
판소리 ‘수궁가’에서 토끼는 자라에게 속아 용궁까지 끌려갔다가 재치로 위기를 벗어나 육지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그 뒤 토끼와 자라에게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국립창극단의 <귀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2021년 초연 당시 객석 점유율 99%를 기록하고 2022년 재연된 <귀토>가 4년 만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으로 돌아온다. 고선웅이 극본과 연출을 맡고, 한승석이 공동작창·작곡·음악감독, 유수정이 공동작창으로 참여한 작품이다. 익숙한 고전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수궁가’ 이후의 세계를 상상해 새로운 인물과 서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창극판 스핀오프에 가깝다.

토끼의 아들은 왜 다시 수궁으로 향했을까
이번 이야기의 중심에는 원작의 토끼가 아닌 그의 아들 ‘토자’가 있다. 부모를 잃은 토자는 온갖 고난이 이어지는 산중을 벗어나 더 나은 세상이라 믿는 수국으로 향한다. 하지만 꿈꾸던 그곳 역시 욕망과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다. 산중을 피해 수궁으로 간 토자의 여정은 결국 이상향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에서,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갈 곳을 다시 바라보는 이야기로 방향을 튼다.
제목 ‘귀토(龜兎)’가 자라와 토끼를 가리키는 동시에 ‘귀토(歸土)’, 삶의 터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선웅은 ‘수궁가’에서 토끼가 육지의 고난을 늘어놓는 ‘삼재팔란’ 대목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작품 속 “물이나 뭍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말처럼, 더 나은 곳을 찾아 이동해도 삶의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귀토>가 현실의 고단함을 무겁게 설교하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이 코앞에 닥쳐도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인물들과 예상을 비껴가는 사건, 빠른 대사와 풍자가 극을 밀고 간다. “죽어 나자빠진다고 끝이냐, 아서라 말어라 생은 또 열린다!”라는 대사는 작품의 태도를 압축한다. 삶의 고단함을 없애기보다 웃어넘길 힘과 다시 살아갈 기운을 판소리의 해학으로 건네는 셈이다.
‘수궁가’의 소리는 어떻게 오늘의 음악이 됐나
음악은 원전 ‘수궁가’와 새 이야기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한승석과 유수정은 원전의 주요 곡조를 바탕으로 인물과 장면에 맞는 소리를 새롭게 구성했다.
느리고 유장하게 불리는 ‘범피중류’는 자진모리장단으로 바뀌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토자의 들뜬 마음을 표현하고, ‘망해가’에서는 점층적인 박자 분할과 2부 합창으로 거센 파도의 움직임을 그려낸다. 철현금과 생황, 철가야금 등을 포함한 15인조 라이브 연주 역시 배우들의 소리와 직접 호흡한다.

김수인·김우정·최용석, 달라진 얼굴로 돌아온 <귀토>
4년 만의 무대에서는 주역들의 얼굴도 달라진다. 토자 역은 김수인, 토자의 연인 토녀 역은 김우정, 토자를 수궁으로 데려가는 자라 역은 최용석이 맡는다. 세 사람 모두 이전 <귀토>에 다른 역할로 출연한 경험이 있어, 작품 안에서 위치를 옮겨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간다는 점도 흥미롭다. 용왕 역에는 우지용, 주꾸미 역에는 박성우가 새롭게 합류한다.
특히 김수인과 김우정은 2020년 국립창극단에 함께 입단한 동갑내기 단원이다. 각각 토자와 토녀로 만나 익살스러운 관계와 위기 속에서 함께 살아남으려는 두 인물의 호흡을 만들어낸다. 이전 공연에서 주꾸미 역을 맡았던 최용석은 이번에는 충직한 자라가 되어 토자를 수궁으로 이끈다.

바닥에서 후면까지, 확장된 무대가 만드는 새로운 수궁
무대 역시 이번 공연에서 눈여겨볼 부분이다. 1,500여 개의 각목을 이어 붙인 경사진 언덕과 8m×8m 크기의 바닥 LED에 새롭게 14m×3m 후면 LED가 더해진다. 산중과 수궁,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공간이 하나의 고정된 배경이 아니라 영상과 배우의 움직임에 따라 계속 변화하도록 구성된다.
동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는 방식도 <귀토>의 특징이다. 김영진 의상디자이너는 광목과 삼베를 중심으로 한 한복에 수중 동물을 연상시키는 색과 형태를 더했고, 안무가 지경민은 공옥진의 춤사위에서 착안해 동물의 몸짓을 직접 흉내 내기보다 배우의 신체 안에서 각 인물의 특성을 끌어낸다. 전통적인 소재를 현대적 무대 기술로 감싸는 대신, 소리와 몸, 의상과 영상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귀토>를 볼 때는 토자가 꿈꾸던 ‘더 나은 곳’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따라가 봐도 좋다. 산중을 떠날 때의 기대, 처음 바다를 건널 때의 설렘, 수궁에서 다시 만나는 욕망과 갈등을 지나면서 이상향의 의미도 조금씩 달라진다. 그 변화는 “어디로 가야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꿔놓는다.
‘수궁가’가 토끼의 귀환으로 끝났다면 <귀토>는 그 귀환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데서 출발한다. 더 좋은 세상을 찾아 떠났다가 다시 자신의 땅을 바라보는 토자의 여정은 오래된 판소리 속 이야기를 오늘의 감각 가까이 불러온다. 웃음과 신명 끝에 남는 것은 완벽한 이상향에 대한 답보다, 고단해도 다시 살아갈 ‘지금 여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공연 정보
국립창극단 〈귀토〉
- 일시|2026년 9월 3일(목) - 9월 6일(일) / 목·금 오후 7시 30분, 토·일 오후 3시
- 장소|국립극장 해오름극장
- 관람시간|135분(휴식 20분 포함)
- 관람연령|초등학생 이상(2019년 12월 31일 이전 출생자)
- 티켓|VIP석 8만 원 / R석 6만 원 / S석 4만 원 / A석 2만 원
- 예매|국립극장, NOL 티켓
- 문의|국립극장 02-2280-4114 / NOL 티켓 1544-1555
- 극본·연출|고선웅
- 작곡·음악감독|한승석
- 작창|유수정·한승석
판소리 ‘수궁가’에서 토끼는 자라에게 속아 용궁까지 끌려갔다가 재치로 위기를 벗어나 육지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그 뒤 토끼와 자라에게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국립창극단의 <귀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2021년 초연 당시 객석 점유율 99%를 기록하고 2022년 재연된 <귀토>가 4년 만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으로 돌아온다. 고선웅이 극본과 연출을 맡고, 한승석이 공동작창·작곡·음악감독, 유수정이 공동작창으로 참여한 작품이다. 익숙한 고전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수궁가’ 이후의 세계를 상상해 새로운 인물과 서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창극판 스핀오프에 가깝다.
토끼의 아들은 왜 다시 수궁으로 향했을까
이번 이야기의 중심에는 원작의 토끼가 아닌 그의 아들 ‘토자’가 있다. 부모를 잃은 토자는 온갖 고난이 이어지는 산중을 벗어나 더 나은 세상이라 믿는 수국으로 향한다. 하지만 꿈꾸던 그곳 역시 욕망과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다. 산중을 피해 수궁으로 간 토자의 여정은 결국 이상향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에서,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갈 곳을 다시 바라보는 이야기로 방향을 튼다.
제목 ‘귀토(龜兎)’가 자라와 토끼를 가리키는 동시에 ‘귀토(歸土)’, 삶의 터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선웅은 ‘수궁가’에서 토끼가 육지의 고난을 늘어놓는 ‘삼재팔란’ 대목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작품 속 “물이나 뭍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말처럼, 더 나은 곳을 찾아 이동해도 삶의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귀토>가 현실의 고단함을 무겁게 설교하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이 코앞에 닥쳐도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인물들과 예상을 비껴가는 사건, 빠른 대사와 풍자가 극을 밀고 간다. “죽어 나자빠진다고 끝이냐, 아서라 말어라 생은 또 열린다!”라는 대사는 작품의 태도를 압축한다. 삶의 고단함을 없애기보다 웃어넘길 힘과 다시 살아갈 기운을 판소리의 해학으로 건네는 셈이다.
‘수궁가’의 소리는 어떻게 오늘의 음악이 됐나
음악은 원전 ‘수궁가’와 새 이야기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한승석과 유수정은 원전의 주요 곡조를 바탕으로 인물과 장면에 맞는 소리를 새롭게 구성했다.
느리고 유장하게 불리는 ‘범피중류’는 자진모리장단으로 바뀌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토자의 들뜬 마음을 표현하고, ‘망해가’에서는 점층적인 박자 분할과 2부 합창으로 거센 파도의 움직임을 그려낸다. 철현금과 생황, 철가야금 등을 포함한 15인조 라이브 연주 역시 배우들의 소리와 직접 호흡한다.
김수인·김우정·최용석, 달라진 얼굴로 돌아온 <귀토>
4년 만의 무대에서는 주역들의 얼굴도 달라진다. 토자 역은 김수인, 토자의 연인 토녀 역은 김우정, 토자를 수궁으로 데려가는 자라 역은 최용석이 맡는다. 세 사람 모두 이전 <귀토>에 다른 역할로 출연한 경험이 있어, 작품 안에서 위치를 옮겨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간다는 점도 흥미롭다. 용왕 역에는 우지용, 주꾸미 역에는 박성우가 새롭게 합류한다.
특히 김수인과 김우정은 2020년 국립창극단에 함께 입단한 동갑내기 단원이다. 각각 토자와 토녀로 만나 익살스러운 관계와 위기 속에서 함께 살아남으려는 두 인물의 호흡을 만들어낸다. 이전 공연에서 주꾸미 역을 맡았던 최용석은 이번에는 충직한 자라가 되어 토자를 수궁으로 이끈다.
바닥에서 후면까지, 확장된 무대가 만드는 새로운 수궁
무대 역시 이번 공연에서 눈여겨볼 부분이다. 1,500여 개의 각목을 이어 붙인 경사진 언덕과 8m×8m 크기의 바닥 LED에 새롭게 14m×3m 후면 LED가 더해진다. 산중과 수궁,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공간이 하나의 고정된 배경이 아니라 영상과 배우의 움직임에 따라 계속 변화하도록 구성된다.
동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는 방식도 <귀토>의 특징이다. 김영진 의상디자이너는 광목과 삼베를 중심으로 한 한복에 수중 동물을 연상시키는 색과 형태를 더했고, 안무가 지경민은 공옥진의 춤사위에서 착안해 동물의 몸짓을 직접 흉내 내기보다 배우의 신체 안에서 각 인물의 특성을 끌어낸다. 전통적인 소재를 현대적 무대 기술로 감싸는 대신, 소리와 몸, 의상과 영상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귀토>를 볼 때는 토자가 꿈꾸던 ‘더 나은 곳’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따라가 봐도 좋다. 산중을 떠날 때의 기대, 처음 바다를 건널 때의 설렘, 수궁에서 다시 만나는 욕망과 갈등을 지나면서 이상향의 의미도 조금씩 달라진다. 그 변화는 “어디로 가야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꿔놓는다.
‘수궁가’가 토끼의 귀환으로 끝났다면 <귀토>는 그 귀환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데서 출발한다. 더 좋은 세상을 찾아 떠났다가 다시 자신의 땅을 바라보는 토자의 여정은 오래된 판소리 속 이야기를 오늘의 감각 가까이 불러온다. 웃음과 신명 끝에 남는 것은 완벽한 이상향에 대한 답보다, 고단해도 다시 살아갈 ‘지금 여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공연 정보
국립창극단 〈귀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