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은 산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현대 경제학이 가진 돈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면 당연한 일이다. 현대의 경제학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현상의 해석 방법처럼 –현대 물리학을 연상하면 된다 – “인간들의 돈”을 해석하는 데에 집중해 왔기 때문이다. 부분화와 해석적(algebraic) 방법을 당연하게 적용함으로써 “인간들의 돈”은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연환경처럼 인공환경이 되고 말았다. 돈은 우리들의 주머니에서 은행 시스템의 전자 부호로 이동하고, 자연에너지를 전환시켜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물리학 이론처럼 돈의 시차를 이용하여 새로운 돈을 만들어내는 경제이론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물론 돈이 우리들의 생산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러나 생산보다 시차 분석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만들어내는, 알 듯 모를듯한 상황으로 시대는 이미 바뀌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돈은 자연환경처럼 우리가 극복하고 이용해야 하는 천둥번개와 따듯한 햇살을 비춰주는 인공자연이 되고 있는 중이다.
자연을 통한 삶의 의미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물리학을 잘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깨닫고, 이를 공존의 기초로 삼으며, 다음 세대에 지금보다 나은 자연을 물려주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는 것에 쉽게 동의한다. 물리학을 몰라도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자연을 이용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자연을 삶의 기초로 삼고, 영속의 시간 속에서 시간의 의미를 깨달아서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자연을 물려주려는 삶의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가치를 더 고양시킬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존 러스킨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이와 동일하다. 경제활동을 할 때, 타인의 ‘가치’와 ‘관계’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고, 정의로운 부를 축적하려고 노력하고, 돈과 타인의 이용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공존의 기초로 삼아야 하며, 다음 세대에게 더욱 깨끗한 부를 물려주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방식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존 러스킨은 사회주의자가 아니고, 자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여 세계 발전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 ‘가치주의자’이다. 그는 ‘자본에는 마음이 없다’는 경제학자들의 생각이 틀렸고, ‘자본은 마음의 결과이며 원인이고, 선한 마음이 더 나은 자본, 정의로운 자본을 만들며, 정의로운 자본이 사회를 발전시킨다.’라고 생각한다.
돈이 점점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연처럼 인공환경이 되고 있는 현대에는 개인이 성실하게 살아가려 해도 자신의 행위와 관계없이 경제적 난관을 겪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존 러스킨이 이야기한 돈의 의미를 잘 이해한다면 세계화의 풍랑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삶이 조금 더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존재론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에 부하뇌동하거나 타인의 삶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고양하는 것이 삶의 중요한 의미라면, 그의 경제론은 삶의 지표로서 손색이 없다.
존 러스킨은 명시적으로 시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와 현대 경제학자들의 차이점은 ‘시간에 대한 태도’에도 있다. 그에게 시간은 약속과 관계에 따라 우리가 경험하는, 파도처럼 퍼져나가는 시간(diachronic)이다. 현대 경제학자들의 시간은 물리학의 시간처럼 절대적이고 우주적 시간(synchronic)이다. 현대 경제학의 시간은 인간의 다원성을 배제하여 고난도 수학을 적용하고, 엄밀하게 객관적인 차이를 읽어 낸다. 그 차이를 추출하여 인간의 마음을 적용하면, 아무도 이해가 안 되는 자본의 이전(해석할 수 없는 사람에게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에게로)이 가능하고, 부의 불평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현대 경제학도 이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2013년에 발표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나 2017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의 ‘넛지’ 같은 것이 좋은 사례이다.
현대의 경제가 자연환경처럼 폭풍이 몰아치고 쓰나미가 일어나는 인공환경이 되었다는 비유는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화의 결과로 일어나는 불평등과 경제대란을 돈의 횡포라고 분노하는 것은 원시인이 날씨를 원망하면서 기우제를 지내는 것과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 현대의 경제학이 다시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돈은 마음을 반영하는 ‘상징이자 기호’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세계화의 현대 경제 속에서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존 러스킨의 경제론은 경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주체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개인, 기업, 국가 같은 경제주체가 광풍의 혹한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약속과 관계의 시간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의 의미를 이해하고, 가치의 다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 다시 말하면 정의로움을 사유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것이 우리가 가장 오랫동안 삶의 기초를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메시지다.
마르크스는 끝났지만, 존 러스킨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경영자와 예술가는 기업과 개인의 대표적인 주체이다. 이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스스로 가치를 통합하려는 사람과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세계가 가치와 관계, 그리고 우리의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때,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고, 자신의 삶을 구현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존 러스킨은 경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이해하고 실천할지를 그 시대의 수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시대는 바뀌어 실천의 방식은 바뀌었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돈의 핵심 키워드 ‘가치, 관계, 시간’의 의미는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유효하다.
지금까지 소개한 존 러스킨의 이야기를 읽고, 혹시 이 책을 도덕교과서처럼 옳은 말이지만 당장 나에게 이득이 되는 내용은 없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경영인과 예술가가 자신이 처한 세계의 ‘가치’ ‘관계’ ‘시간’의 공백과 모순을 찾아내면, 그것은 곧바로 경영인과 예술가의 기회가 된다. 굳이 공백과 모순을 찾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작업과 경제활동이 세 가지 키워드를 지키고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작업과 활동의 불확실성을 없애주는 좋은 지침이 된다.
기술의 발전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 삶의 행동양식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을 바꾸고, 바뀐 감각이 우리의 가치와 관계를 바꾸며, 우리의 시간의 의미를 바꾼다. 우리의 가치와 관계가 바뀌면, 우리의 니즈와 불편함이 증가한다. 사람들의 새로운 니즈와 불편함은 경영인에게 기회이자 위기이다. 가치와 관계가 바뀌면, 세계의 권력도 이동한다. 새로운 권력의 당연함을 드러내는 것은 예술가의 역할이다. 새로운 권력을 드러냄으로써 예술가는 아름다움과 정의를 밝히는 선구자의 역할을 한다.
앞에서 언급한 2008년의 두 가지 사건은 ‘자본’의 잘못된 사례로 교묘히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이 물리적으로 돈을 취급할 때 일어나는 재앙을 보여주었고, 이에 놀란 ‘자본’이 160년 된 은행도 믿을 수 없으니, 가장 안전하고 사이즈 대비 가장 비싼 예술품을 돈의 저장 수단으로 취급하는 해프닝을 보여주었다. 두 가지 사건 모두 탐욕과 무지에 근거했고 비싼 대가를 치렀다.
어떤 예술품이 최고가를 갱신하는 현상은 어떤 의미가 시간이 갈수록 빛나게 하는 상징적 이벤트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그 예술품을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감상하면서 최고가 갱신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예술품의 소유자는 의미 강화의 대가로 자본이 늘어나는 혜택을 받을 것이고, 의미 해석이 잘못되었다면, 당연히 그 소유자는 손실의 아픔을 감내하면 된다. 2008년의 대형 경매는 실망스럽고 사필귀정이라고 보면 되겠다.
경영자와 예술가가 돈에 대하여 반듯한 이해를 가지는 것은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경영자와 예술가는 길을 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외부로부터 우리를 지키면서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하는 어려운 길을 찾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경멸의 대상이나 질시의 대상이 아니고 존경과 숭배의 대상도 아니다. 단지 그 자본을 가지거나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이 경멸과 존경의 대상일 뿐이라는 이해가 중요하다. 자본의 현재는 인간의 기억처럼 온갖 오욕과 땀이 배어있으며, 소망과 사랑도 담겨 있는 과거의 오늘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기억을 지우려는 것이 오만인 것처럼 현재의 자본을 지우려는 것도 오만이다. 다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자본의 미래를 열어갈 인간의 마음과 미래의 시간을 이해하는 일이다.
존 러스킨이 4편의 논문을 모아 책의 타이틀로 사용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신자이던 비신자이던 한번 알아두면 좋은 내용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결국 ‘나중에 온 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국내에는 두 가지 번역본이 출간되어 있다. 직역 본(아인북스 간행)과 완역본(느린 걸음 간행)이 있다. 직역 본은 원문에 충실하지만 150년 전 문장을 옮기는 과정에서 거칠고 늘어지는 느낌이 있고, 완역본은 현대적인 문장으로 읽기가 수월하다. 하지만 완역본은 어떤 문장들을 통째로 빼먹은 오류가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같은 문장을 통째로 빠트렸다. 자갈길을 걸어도 그 길에서 금맥을 스스로 찾는 즐거움을 기대한다면, 직역 본(아인북스)을 읽기를 권한다.
한 마디 더하자면, 존 러스킨이 ‘가치, 관계, 시간’이라는 핵심 키워드를 직접 강조하지 않았다. 존 러스킨이 직접 언급한 것은 ‘가치’이지만, 그의 책 내내 이 세 가지 키워드를 돈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책 소개를 위해 편의상 내가 키워드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필요한 일로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이 책에는 이 외에도 통찰력을 보여주는 많은 문장들이 있으니, 직접 일독하시기 바란다.
인터넷에 허브가 있는 것처럼, 생각에도 허브가 있습니다. 이 칼럼은 가능하다면 ‘생각의 허브’를 찾아 소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생각을 낳은 ‘생각의 허브’를 직접 읽으면, 가독성은 좀 떨어지더라도 조금 더 새로운 각자의 생각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다음에는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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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영컨설턴트로 경영혁신, M&A, 벤처투자 등의 일을 하며 20대(1984)부터 10년을 보냈다. 인터넷 사업(1995)과 포스트인터넷사업(건축,2002)을 하면서 30대 이후 10년을 보냈고, 이후 경영전략, 인터넷, 지식, 건축, 문화에 관한 생각과 실천을 삶의 모토로 생각하면서 지낸다. 경영과 예술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클래식기타를 취미로 하고 최근 유투브에 기타곡과 자작곡을 올리기도 한다. (etime2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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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산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현대 경제학이 가진 돈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면 당연한 일이다. 현대의 경제학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현상의 해석 방법처럼 –현대 물리학을 연상하면 된다 – “인간들의 돈”을 해석하는 데에 집중해 왔기 때문이다. 부분화와 해석적(algebraic) 방법을 당연하게 적용함으로써 “인간들의 돈”은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연환경처럼 인공환경이 되고 말았다. 돈은 우리들의 주머니에서 은행 시스템의 전자 부호로 이동하고, 자연에너지를 전환시켜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물리학 이론처럼 돈의 시차를 이용하여 새로운 돈을 만들어내는 경제이론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물론 돈이 우리들의 생산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러나 생산보다 시차 분석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만들어내는, 알 듯 모를듯한 상황으로 시대는 이미 바뀌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돈은 자연환경처럼 우리가 극복하고 이용해야 하는 천둥번개와 따듯한 햇살을 비춰주는 인공자연이 되고 있는 중이다.
자연을 통한 삶의 의미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물리학을 잘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깨닫고, 이를 공존의 기초로 삼으며, 다음 세대에 지금보다 나은 자연을 물려주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는 것에 쉽게 동의한다. 물리학을 몰라도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자연을 이용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자연을 삶의 기초로 삼고, 영속의 시간 속에서 시간의 의미를 깨달아서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자연을 물려주려는 삶의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가치를 더 고양시킬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존 러스킨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이와 동일하다. 경제활동을 할 때, 타인의 ‘가치’와 ‘관계’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고, 정의로운 부를 축적하려고 노력하고, 돈과 타인의 이용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공존의 기초로 삼아야 하며, 다음 세대에게 더욱 깨끗한 부를 물려주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방식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존 러스킨은 사회주의자가 아니고, 자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여 세계 발전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 ‘가치주의자’이다. 그는 ‘자본에는 마음이 없다’는 경제학자들의 생각이 틀렸고, ‘자본은 마음의 결과이며 원인이고, 선한 마음이 더 나은 자본, 정의로운 자본을 만들며, 정의로운 자본이 사회를 발전시킨다.’라고 생각한다.
돈이 점점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연처럼 인공환경이 되고 있는 현대에는 개인이 성실하게 살아가려 해도 자신의 행위와 관계없이 경제적 난관을 겪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존 러스킨이 이야기한 돈의 의미를 잘 이해한다면 세계화의 풍랑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삶이 조금 더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존재론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에 부하뇌동하거나 타인의 삶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고양하는 것이 삶의 중요한 의미라면, 그의 경제론은 삶의 지표로서 손색이 없다.
존 러스킨은 명시적으로 시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와 현대 경제학자들의 차이점은 ‘시간에 대한 태도’에도 있다. 그에게 시간은 약속과 관계에 따라 우리가 경험하는, 파도처럼 퍼져나가는 시간(diachronic)이다. 현대 경제학자들의 시간은 물리학의 시간처럼 절대적이고 우주적 시간(synchronic)이다. 현대 경제학의 시간은 인간의 다원성을 배제하여 고난도 수학을 적용하고, 엄밀하게 객관적인 차이를 읽어 낸다. 그 차이를 추출하여 인간의 마음을 적용하면, 아무도 이해가 안 되는 자본의 이전(해석할 수 없는 사람에게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에게로)이 가능하고, 부의 불평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현대 경제학도 이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2013년에 발표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나 2017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의 ‘넛지’ 같은 것이 좋은 사례이다.
현대의 경제가 자연환경처럼 폭풍이 몰아치고 쓰나미가 일어나는 인공환경이 되었다는 비유는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화의 결과로 일어나는 불평등과 경제대란을 돈의 횡포라고 분노하는 것은 원시인이 날씨를 원망하면서 기우제를 지내는 것과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 현대의 경제학이 다시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돈은 마음을 반영하는 ‘상징이자 기호’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세계화의 현대 경제 속에서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존 러스킨의 경제론은 경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주체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개인, 기업, 국가 같은 경제주체가 광풍의 혹한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약속과 관계의 시간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의 의미를 이해하고, 가치의 다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 다시 말하면 정의로움을 사유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것이 우리가 가장 오랫동안 삶의 기초를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메시지다.
마르크스는 끝났지만, 존 러스킨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경영자와 예술가는 기업과 개인의 대표적인 주체이다. 이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스스로 가치를 통합하려는 사람과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세계가 가치와 관계, 그리고 우리의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때,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고, 자신의 삶을 구현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존 러스킨은 경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이해하고 실천할지를 그 시대의 수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시대는 바뀌어 실천의 방식은 바뀌었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돈의 핵심 키워드 ‘가치, 관계, 시간’의 의미는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유효하다.
지금까지 소개한 존 러스킨의 이야기를 읽고, 혹시 이 책을 도덕교과서처럼 옳은 말이지만 당장 나에게 이득이 되는 내용은 없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경영인과 예술가가 자신이 처한 세계의 ‘가치’ ‘관계’ ‘시간’의 공백과 모순을 찾아내면, 그것은 곧바로 경영인과 예술가의 기회가 된다. 굳이 공백과 모순을 찾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작업과 경제활동이 세 가지 키워드를 지키고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작업과 활동의 불확실성을 없애주는 좋은 지침이 된다.
기술의 발전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 삶의 행동양식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을 바꾸고, 바뀐 감각이 우리의 가치와 관계를 바꾸며, 우리의 시간의 의미를 바꾼다. 우리의 가치와 관계가 바뀌면, 우리의 니즈와 불편함이 증가한다. 사람들의 새로운 니즈와 불편함은 경영인에게 기회이자 위기이다. 가치와 관계가 바뀌면, 세계의 권력도 이동한다. 새로운 권력의 당연함을 드러내는 것은 예술가의 역할이다. 새로운 권력을 드러냄으로써 예술가는 아름다움과 정의를 밝히는 선구자의 역할을 한다.
앞에서 언급한 2008년의 두 가지 사건은 ‘자본’의 잘못된 사례로 교묘히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이 물리적으로 돈을 취급할 때 일어나는 재앙을 보여주었고, 이에 놀란 ‘자본’이 160년 된 은행도 믿을 수 없으니, 가장 안전하고 사이즈 대비 가장 비싼 예술품을 돈의 저장 수단으로 취급하는 해프닝을 보여주었다. 두 가지 사건 모두 탐욕과 무지에 근거했고 비싼 대가를 치렀다.
어떤 예술품이 최고가를 갱신하는 현상은 어떤 의미가 시간이 갈수록 빛나게 하는 상징적 이벤트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그 예술품을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감상하면서 최고가 갱신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예술품의 소유자는 의미 강화의 대가로 자본이 늘어나는 혜택을 받을 것이고, 의미 해석이 잘못되었다면, 당연히 그 소유자는 손실의 아픔을 감내하면 된다. 2008년의 대형 경매는 실망스럽고 사필귀정이라고 보면 되겠다.
경영자와 예술가가 돈에 대하여 반듯한 이해를 가지는 것은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경영자와 예술가는 길을 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외부로부터 우리를 지키면서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하는 어려운 길을 찾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경멸의 대상이나 질시의 대상이 아니고 존경과 숭배의 대상도 아니다. 단지 그 자본을 가지거나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이 경멸과 존경의 대상일 뿐이라는 이해가 중요하다. 자본의 현재는 인간의 기억처럼 온갖 오욕과 땀이 배어있으며, 소망과 사랑도 담겨 있는 과거의 오늘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기억을 지우려는 것이 오만인 것처럼 현재의 자본을 지우려는 것도 오만이다. 다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자본의 미래를 열어갈 인간의 마음과 미래의 시간을 이해하는 일이다.
존 러스킨이 4편의 논문을 모아 책의 타이틀로 사용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신자이던 비신자이던 한번 알아두면 좋은 내용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결국 ‘나중에 온 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국내에는 두 가지 번역본이 출간되어 있다. 직역 본(아인북스 간행)과 완역본(느린 걸음 간행)이 있다. 직역 본은 원문에 충실하지만 150년 전 문장을 옮기는 과정에서 거칠고 늘어지는 느낌이 있고, 완역본은 현대적인 문장으로 읽기가 수월하다. 하지만 완역본은 어떤 문장들을 통째로 빼먹은 오류가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같은 문장을 통째로 빠트렸다. 자갈길을 걸어도 그 길에서 금맥을 스스로 찾는 즐거움을 기대한다면, 직역 본(아인북스)을 읽기를 권한다.
한 마디 더하자면, 존 러스킨이 ‘가치, 관계, 시간’이라는 핵심 키워드를 직접 강조하지 않았다. 존 러스킨이 직접 언급한 것은 ‘가치’이지만, 그의 책 내내 이 세 가지 키워드를 돈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책 소개를 위해 편의상 내가 키워드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필요한 일로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이 책에는 이 외에도 통찰력을 보여주는 많은 문장들이 있으니, 직접 일독하시기 바란다.
인터넷에 허브가 있는 것처럼, 생각에도 허브가 있습니다. 이 칼럼은 가능하다면 ‘생각의 허브’를 찾아 소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생각을 낳은 ‘생각의 허브’를 직접 읽으면, 가독성은 좀 떨어지더라도 조금 더 새로운 각자의 생각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다음에는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