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러스킨 지음 | 곽계일 옮김 | 아인북스 펴냄
2008년 가을에, 돈에 관해서 의미 있는 두 가지 인상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6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투자은행 리만브라더스의 파산을 시작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9월에 일어났고, ‘세계화’에 매진하던 경제계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영국의 작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데미안 허스트가 고기 덩어리, 뼈, 화학약품, 곤충을 이용한 자신의 작품들을 직접 경매하여 2천억이 넘는 경매가를 기록하면서 200여 점의 작품을 거의 완판 하는 기록을 남겼다.
두 가지 사건은 2008년이 기억되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공학적으로 돈을 취급하는 미시적 현대 경제학이 세계를 발전시키는데 큰 위험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세계를 구원하는데 턱도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월가의 금융기관들이 공학적 금융기법들을 도입한 지 20년도 안되어서 일어난 리만브라더스의 파산은 과거의 금융기관 파산과는 다르다.
과거의 금융기관 파산은 내부자의 횡령이나 경기침체 시의 경영 미숙이 원인이라고 본다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리스크 회피 기법을 충실히 따르다가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리스크 회피 기법은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 리스크 프리, 다른 말로 절대 손해 안 보는 금융기법이다. 그런데, 온 세계가 리스크 회피 작업에 매진한 결과, 모두 다 망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모두 다 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가 매우 큰돈을 수혈하고, 패닉 상항을 막음으로써 사태는 진정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월가의 금융기관들이나 미국이 짊어지는 게 아니라 온 세계가 함께 짊어지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돈이 시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 시간을 잘못 이해했을 때, 붕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인한 홍콩 거리 시위
한 달 후, 연이어 진행된 ‘데미안 허스트 경매’는 예술과 돈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하는데 모자람이 없는 아트 퍼포먼스이었다. 데미안 허스트 스스로는 그 경매가 ‘행위예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십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작품가는 반의 반 토막이 나서 당시의 투자자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재평가는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에 데미안 허스트가 이제 와서 새삼 그 경매 자체가 아트였고, 그 아트 퍼포먼스의 참여자이자 희생자인 투자자들이 소유한 내 작품은 그 ‘예술정신’의 산 증거라고 우기면, 다시 작품 가격이 몇 배로 뛰는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직 데미안 허스트는 돈과 예술에 관한 다른 메시지나 예술 흔적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벌거벗은 임금님’의의 생생한 현장을 보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Damien Hirst’s The Golden Calf. 2008
2008년 가을에 우리는 첨단의 경제주체와 최고의 예술집단이 돈에 관해서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는 모습을 보았다. 2008년의 돈은 추하고, 많은 사람을 위협하는 그 어떤 것이었고, 그 일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부끄러운 행태를 보였다. 그러나, 예술과 돈은 때때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상징이며, 부끄럽지 않은 공통의 의미를 추구한다.
1850년 리만 브라더스가 설립되고 10여 년이 지난 후, 존 러스킨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타이틀로 경제논문 4편을 한 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작가이자 예술비평가였던 존 러스킨은 인생의 후기에 사회비평가 혹은 사회개혁가(?)로 활동했는데, 그의 후기 저작 중에서 이 책이 가장 유명하고, 1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생각이 다시 읽히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 경제학에 반기를 들고 ‘자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책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에 반기를 들고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발표한 것은 그로부터 7년 후이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자본론’의 수려한 문장에 못 미치고, 사회개혁에 있어서도 선동력이 훨씬 못 미치지만, 그 사고의 깊이에 있어서 150년이 지난 지금, ‘포스트모던’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길을 밝혀주고 생각하게 하는, 통찰력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의 경제학은 “가치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경제는 돈으로 먹거리를 구해야 하고, 미래를 위하여 돈을 저축해야 하며, 생산을 위하여 자본을 투자해야 하는, 살아있는 인간에게 던지는 ‘돈의 존재적 의미’이다. 삶의 수단으로만 경제를 이해할 때, 돈이 가진 지배력을 간과할 때, 혹은 그 지배력을 과신할 때, 타인의 존재를 수단으로 받아들일 때, 생명이 궁극의 목적이었다는 것을 잊을 때, “타인들”과 “나”라는 관계를 올바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우리가 처하게 될 존재 위험을 경고하는 경제학이다.
돈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고 과민한 대상이다. 돈은 우리 생명의 기초가 되고, 인간관계의 원인인 경우가 많고, 미래(시간)의 안전을 담보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현대화된 이 시대에 돈으로부터 – 다시 말하면 생명, 관계, 시간 –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혹시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돈이 생명, 관계, 시간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혹은 돈이 있어야 생명, 관계, 시간이 유지된다는 뜻이 아니다. 생명, 관계, 시간으로부터, 혹은 이를 위하여 돈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생명을 잃고, 관계를 포기하며, 시간을 허비한다. 심지어 경제학자들도 그렇고, 이를 부추기기까지 한다고 존 러스킨은 지적하고 분노한다. 경제학자들은 인간을 위해 돈이 생겨났다는 것을 잊고, 이기심과 욕망이 인간의 가장 객관적인 마음이며, 돈을 모으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가치전도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상인이 이기심만으로 부를 지속할 수 없으며, 경영의 통합을 위해 노동자에 대한 의무, 인내와 배려, 때로는 목숨을 건 희생이라는 이라는 덕목이 있기 때문에 부가 유지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기심이 경제의 추동력이라는 근대 경제학은 기본 가정에서부터 ‘기만행위’라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 많은 경제학자들이 틀린 것일까?
나도 존 러스킨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존 러스킨의 저서를 읽으면, 분명히 옳음에도 불구하고 아슬아슬하다. 너무 순진해 보이기도 한다. 모든 노동자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고, 노동자에게 스스로 다른 사람을 고용할 수 있을 만큼, 다시 말하면 저축할 수 있을 만큼 지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자에게 노조가 있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명예의 근원) 오늘에 와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로서는 급진적이라고 생각되는 이 말들 때문에 그는 사회주의자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비난에 대해서 분명하게 자신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도리어 부를 소유하는 것이 사회 발전을 위해 옳다고 주장한다. 자본은 그 자체로 선악이 없으며, 마음을 포함한 어떤 과정의 현재 상황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자고 이야기한다. 자본을 소유한 사람은 그냥 부가 아니라 “정의로운 부”를 소유하려고 힘쓰라고 이야기한다. “정의로운 부”가 우리의 존재 의미를 어떻게 고양시키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문의 목적이다. ‘정의로운 부’는 미래의 ‘시간’에 ‘가치’를 증대시키고, ‘관계’를 확장하는 것으로 증명된다고 말한다.(부의 광맥) 자본에는 선악이 없으며, 자본을 소유한 사람의 마음에 선악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미래를 위해 자본을 축적하고 바르게 쓰일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단순화시켜 사례로 제시한 “둘이 사는 섬의 노동과 교환”은 돈이 가지고 있는 의미 세 가지를 정확하게 함축하고 있는 단순화 모델이다. 돈은 “상호의존성”과 “가치”의 표현이며 “시간”의 교환수단이라는 의미이다. 돈을 사용하여 거래한다는 것은 상호의존성을 구체화하고, 가치 인식의 다름을 확인시켜주며, “존재”의 가장 기초인 시간을 교환하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또한 돈의 축적은 가치의 “생산”이라는 “생명력 있는 활동”으로만 지속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그는 돈을 축적하고 소비하는 때에 ‘가치, 관계, 시간의 악용’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상호의존성을 이용하여 타인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타인의 시간을 빼앗지 말고, 가치판단을 잘못하여 사치나 허영을 조장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부를 축적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존재 의미를 고양시킬 수 있고 사회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경제 이야기는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성과는 존 러스킨보다 경제학자들의 성과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경제학자들의 이론은 날로 심화되고 치밀해져서, 경제학 논문에 사람은 없고 수학식만 가득한 지경이다. 나도 ‘사람은 죽는다’라는 함의만 포함된, 수학식으로만 가득 찬 논문을 썼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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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영컨설턴트로 경영혁신, M&A, 벤처투자 등의 일을 하며 20대(1984)부터 10년을 보냈다. 인터넷 사업(1995)과 포스트인터넷사업(건축,2002)을 하면서 30대 이후 10년을 보냈고, 이후 경영전략, 인터넷, 지식, 건축, 문화에 관한 생각과 실천을 삶의 모토로 생각하면서 지낸다. 경영과 예술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클래식기타를 취미로 하고 최근 유투브에 기타곡과 자작곡을 올리기도 한다. (etime2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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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 지음 | 곽계일 옮김 | 아인북스 펴냄
2008년 가을에, 돈에 관해서 의미 있는 두 가지 인상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6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투자은행 리만브라더스의 파산을 시작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9월에 일어났고, ‘세계화’에 매진하던 경제계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영국의 작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데미안 허스트가 고기 덩어리, 뼈, 화학약품, 곤충을 이용한 자신의 작품들을 직접 경매하여 2천억이 넘는 경매가를 기록하면서 200여 점의 작품을 거의 완판 하는 기록을 남겼다.
두 가지 사건은 2008년이 기억되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공학적으로 돈을 취급하는 미시적 현대 경제학이 세계를 발전시키는데 큰 위험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세계를 구원하는데 턱도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월가의 금융기관들이 공학적 금융기법들을 도입한 지 20년도 안되어서 일어난 리만브라더스의 파산은 과거의 금융기관 파산과는 다르다.
과거의 금융기관 파산은 내부자의 횡령이나 경기침체 시의 경영 미숙이 원인이라고 본다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리스크 회피 기법을 충실히 따르다가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리스크 회피 기법은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 리스크 프리, 다른 말로 절대 손해 안 보는 금융기법이다. 그런데, 온 세계가 리스크 회피 작업에 매진한 결과, 모두 다 망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모두 다 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가 매우 큰돈을 수혈하고, 패닉 상항을 막음으로써 사태는 진정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월가의 금융기관들이나 미국이 짊어지는 게 아니라 온 세계가 함께 짊어지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돈이 시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 시간을 잘못 이해했을 때, 붕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인한 홍콩 거리 시위
한 달 후, 연이어 진행된 ‘데미안 허스트 경매’는 예술과 돈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하는데 모자람이 없는 아트 퍼포먼스이었다. 데미안 허스트 스스로는 그 경매가 ‘행위예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십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작품가는 반의 반 토막이 나서 당시의 투자자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재평가는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에 데미안 허스트가 이제 와서 새삼 그 경매 자체가 아트였고, 그 아트 퍼포먼스의 참여자이자 희생자인 투자자들이 소유한 내 작품은 그 ‘예술정신’의 산 증거라고 우기면, 다시 작품 가격이 몇 배로 뛰는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직 데미안 허스트는 돈과 예술에 관한 다른 메시지나 예술 흔적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벌거벗은 임금님’의의 생생한 현장을 보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Damien Hirst’s The Golden Calf. 2008
2008년 가을에 우리는 첨단의 경제주체와 최고의 예술집단이 돈에 관해서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는 모습을 보았다. 2008년의 돈은 추하고, 많은 사람을 위협하는 그 어떤 것이었고, 그 일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부끄러운 행태를 보였다. 그러나, 예술과 돈은 때때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상징이며, 부끄럽지 않은 공통의 의미를 추구한다.
1850년 리만 브라더스가 설립되고 10여 년이 지난 후, 존 러스킨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타이틀로 경제논문 4편을 한 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작가이자 예술비평가였던 존 러스킨은 인생의 후기에 사회비평가 혹은 사회개혁가(?)로 활동했는데, 그의 후기 저작 중에서 이 책이 가장 유명하고, 1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생각이 다시 읽히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 경제학에 반기를 들고 ‘자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책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에 반기를 들고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발표한 것은 그로부터 7년 후이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자본론’의 수려한 문장에 못 미치고, 사회개혁에 있어서도 선동력이 훨씬 못 미치지만, 그 사고의 깊이에 있어서 150년이 지난 지금, ‘포스트모던’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길을 밝혀주고 생각하게 하는, 통찰력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의 경제학은 “가치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경제는 돈으로 먹거리를 구해야 하고, 미래를 위하여 돈을 저축해야 하며, 생산을 위하여 자본을 투자해야 하는, 살아있는 인간에게 던지는 ‘돈의 존재적 의미’이다. 삶의 수단으로만 경제를 이해할 때, 돈이 가진 지배력을 간과할 때, 혹은 그 지배력을 과신할 때, 타인의 존재를 수단으로 받아들일 때, 생명이 궁극의 목적이었다는 것을 잊을 때, “타인들”과 “나”라는 관계를 올바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우리가 처하게 될 존재 위험을 경고하는 경제학이다.
돈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고 과민한 대상이다. 돈은 우리 생명의 기초가 되고, 인간관계의 원인인 경우가 많고, 미래(시간)의 안전을 담보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현대화된 이 시대에 돈으로부터 – 다시 말하면 생명, 관계, 시간 –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혹시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돈이 생명, 관계, 시간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혹은 돈이 있어야 생명, 관계, 시간이 유지된다는 뜻이 아니다. 생명, 관계, 시간으로부터, 혹은 이를 위하여 돈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생명을 잃고, 관계를 포기하며, 시간을 허비한다. 심지어 경제학자들도 그렇고, 이를 부추기기까지 한다고 존 러스킨은 지적하고 분노한다. 경제학자들은 인간을 위해 돈이 생겨났다는 것을 잊고, 이기심과 욕망이 인간의 가장 객관적인 마음이며, 돈을 모으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가치전도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상인이 이기심만으로 부를 지속할 수 없으며, 경영의 통합을 위해 노동자에 대한 의무, 인내와 배려, 때로는 목숨을 건 희생이라는 이라는 덕목이 있기 때문에 부가 유지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기심이 경제의 추동력이라는 근대 경제학은 기본 가정에서부터 ‘기만행위’라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 많은 경제학자들이 틀린 것일까?
나도 존 러스킨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존 러스킨의 저서를 읽으면, 분명히 옳음에도 불구하고 아슬아슬하다. 너무 순진해 보이기도 한다. 모든 노동자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고, 노동자에게 스스로 다른 사람을 고용할 수 있을 만큼, 다시 말하면 저축할 수 있을 만큼 지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자에게 노조가 있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명예의 근원) 오늘에 와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로서는 급진적이라고 생각되는 이 말들 때문에 그는 사회주의자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비난에 대해서 분명하게 자신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도리어 부를 소유하는 것이 사회 발전을 위해 옳다고 주장한다. 자본은 그 자체로 선악이 없으며, 마음을 포함한 어떤 과정의 현재 상황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자고 이야기한다. 자본을 소유한 사람은 그냥 부가 아니라 “정의로운 부”를 소유하려고 힘쓰라고 이야기한다. “정의로운 부”가 우리의 존재 의미를 어떻게 고양시키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문의 목적이다. ‘정의로운 부’는 미래의 ‘시간’에 ‘가치’를 증대시키고, ‘관계’를 확장하는 것으로 증명된다고 말한다.(부의 광맥) 자본에는 선악이 없으며, 자본을 소유한 사람의 마음에 선악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미래를 위해 자본을 축적하고 바르게 쓰일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단순화시켜 사례로 제시한 “둘이 사는 섬의 노동과 교환”은 돈이 가지고 있는 의미 세 가지를 정확하게 함축하고 있는 단순화 모델이다. 돈은 “상호의존성”과 “가치”의 표현이며 “시간”의 교환수단이라는 의미이다. 돈을 사용하여 거래한다는 것은 상호의존성을 구체화하고, 가치 인식의 다름을 확인시켜주며, “존재”의 가장 기초인 시간을 교환하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또한 돈의 축적은 가치의 “생산”이라는 “생명력 있는 활동”으로만 지속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그는 돈을 축적하고 소비하는 때에 ‘가치, 관계, 시간의 악용’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상호의존성을 이용하여 타인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타인의 시간을 빼앗지 말고, 가치판단을 잘못하여 사치나 허영을 조장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부를 축적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존재 의미를 고양시킬 수 있고 사회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경제 이야기는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성과는 존 러스킨보다 경제학자들의 성과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경제학자들의 이론은 날로 심화되고 치밀해져서, 경제학 논문에 사람은 없고 수학식만 가득한 지경이다. 나도 ‘사람은 죽는다’라는 함의만 포함된, 수학식으로만 가득 찬 논문을 썼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