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 책을 출간한 것은 1964년, 지금부터 약 60년 전이라는 것도 의식하면서 읽으면 좋겠다. 지금부터 60년쯤 전인데, 그가 전기시대의 인간과 사회를 묘사한 것이 현재 인터넷 시대를 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도 놀라운 경험이 될 것이다. 서구의 60년대는 한국의 70년대쯤 되는 시대이다. TV와 고속도로, 포드자동차, 로큰롤과 트위스트, 호크니와 로스코 정도가 서구문화의 대표쯤 되고, 우리나라는 초가집 지붕개량을 포함한 새마을 운동이 한참인 시대이다. 그 시대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40년이 지난 인터넷 시대의 개인과 산업, 사회현상을 보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그가 40~50년 후를 예견할 수 있었다면, 그의 생각을 이해하면 우리도 40~50년을 예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다.
‘미디어의 이해’는 주의 깊게 읽어도 은유와 경구가 많고, 언어학자답게 단어와 문장에 스며 있는 오래된 생각들을 암시하면서 미디어를 설명한다. 일반적인 책처럼 객관적인 서술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이미 모호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미디어의 의미를 전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므로 그의 책을 요약하기는 어렵고 소개하는 사람마다 약간 다른 이야기를 전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을 이해하면, 시대를 이해하고 소통해야 하는 경영자와 예술가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기대와 함께 ‘미디어의 이해’의 핵심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미디어는 메시지다.
우리는 흔히 TV나 인터넷처럼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를 미디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미디어의 전달하는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보수언론을 읽는 사람과 진보성향 언론을 접하는 사람은 그 기사 때문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성향을 더 심화시킨다고 생각한다. 맥루한은 우리가 미디어로부터 영향받는 가장 큰 부분은 콘텐츠가 아니고 미디어 자체라고 말한다. 신문을 통해 세계를 읽는 사람과 SNS를 통해 세계를 읽는 사람의 차이는 보수와 진보신문을 읽는 사람들 간의 차이보다 훨씬 크게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맥루한이 말하는 미디어는 정보매체를 이야기한다기보다 인간이 만들어 내고 있는 모든 사물, 혹은 그 사물을 만들어 내는 과학과 기술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내고 사용하는 미디어의 내용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에 의해 변하는 존재이다.
미디어는 핫(hot)하거나 쿨(cold)하다.
미디어(사물)는 우리가 맥락을 채워야 의미와 기능이 완성된다. 사실 모든 사물은 인간의 참여가 있어야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우리가 콘텐츠의 많은 부분을 채워 넣지 않아도 되는 미디어는 핫한 미디어이다. 우리가 전해지는 내용의 의미를 자기 스스로 완성해야 하는 것들은 쿨한 미디어이다. 전기 시대(인터넷 시대)는 핫한 미디어보다 쿨한 미디어를 만들어 내는 시대이다.
핫한 미디어는 사용자의 참여가 많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인간이 내적 완성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다. 주어진 목적을 위해 전문화와 제도화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갈 수 있다. 따라서 탈부족화한 평균적이고 전문화된 모던 사회를 만들어 낸다. 쿨한 미디어는 정보량이 적고 순간적이기 때문에 사용자의 순간적인 참여를 반복한다. 순간의 전체적인 완성, 존재의 서사적 자각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기계시대에서 전기 시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은 점점 진리를 잃어버리고 각자의 신화를 만들어 가는 존재가 된다. 중심을 상실한 포스트모던 사회를 그가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그의 생각에 따르면 포스트 모던한 사회는 필연적이다.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며 인간의 확장은 감각의 마비를 일으킨다.
그의 어록 중에 인상 깊은 말은 ‘인간은 테크놀로지의 성기에 불과하다’가 있다. 인간이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테크놀로지가 만들어 낸 미디어에 의해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는 말단의 메커니즘에 불과하다고 강조한 말이다. 새로운 미디어를 만났을 때, 우리는 그 미디어가 내포하고 있는 인간 감각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 변화가 다시 우리에게 새로움을 만들어 내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새로움을 만들어 내기 전에 우리는 감각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각의 마비를 경험하게 되는데, 감각의 마비는 우리에게 무의식과 무감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분열된 자아의 상태로 이끈다. 감각의 마비를 벗어나는 것은 여러 미디어의 수용과 결합을 통해 가능하다. 감각의 마비를 안전하게 벗어날 때 우리의 감각은 확장된다. 그가 이 부분에서 이야기하는 감각마비의 사회현상은 오늘의 우리 사회와 매우 흡사하다.
미디어는 적극적인 은유이다.
맥루한은 인간이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다른 존재로 바꾸거나 바뀌는 과정을 은유가 하는 일과 같다고 했다. 경험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파괴와 혼돈으로 보일 때, 우리는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그 사태의 전체적인 이해를 하고 사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되돌아 간다. 유머와 속담이 우리에게 통찰력을 주거나 편안하게 하는 것과 동일하다. 미디어는 우리의 경험을 은유적으로 변환(translation)시키는 결과이고 과정이다. 그는 첫 번째 미디어의 예로서 언어를 설명하면서, 언어가 기능하게 된 처음에 인간이 세계에 대해 가지게 된 주도적인 상태(grasp), 그래서 세계를 놓아줄 수 있었던 상황을 예로 들었다. 우리가 새로운 미디어(사물)를 만들어 내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이 단편적으로 전하는 그의 생각이다. 당연히 그의 책은 이보다 훨씬 많은 의미와 재미를 갖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쿨한 태도, 펑키한 스타일을 책을 읽으면서 느껴보기 바란다. 실제로 그가 이 책을 발간하고 많은 비난과 찬사를 받았는데, 실제 라디오 등의 인터뷰에서도 거침없고 희한한 말들, 하지만 정말 그렇겠는데 하는 공감을 일으키는 사회 분석 들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는 인간이 가지는 인식과 이해의 시작점에 감각이 있다는 당연한 가설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그리고 시각, 청각, 촉각과 같은 감각이 고정된 체계가 아니고 우리의 환경에 의해 재배치되는 것이라는 체험적인 사실에 주목한다. 현대인의 감각은 기술과 사물에 의해, 다시 말하면 미디어에 의해 재배치되는 다이내믹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설파한다. 인간의 감각이 그런 것이라면 기계에서 전기로 넘어가는 시대는 좀 더 빨라지고 좀 더 편하고 재미있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도구를 만들고 도구를 이용하는 인간이 도구에 의해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는 그의 생각은 우리가 우리의 근원이며 결과라는 것을 암시한다. 감각마비의 시대에서도 깨어있는 인간에게 세계는 두렵기만 한 것도 아니고 자만할 만한 것도 아니라고 속삭인다.
과학과 기계가 구축하는 성과로 이루어진 산업화의 근대는 자만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시대였다. 기계로 세상을 개척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기술을 선점한 국가는 확장의 욕구를 실행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산업화의 막바지에 이른 근대는 세계대전과 제국주의가 당연하고 가능한 시대였다. 그것은 로마가 세계를 정복한 이래로 수 천년 동안 일관된 세계의 목표였다. 그런데 이제 전기의 시대가 왔고, 인간은 정복과 피정복의 세계에서(explosion) 다른 새로운 시대로 이전했다는 것(implosion)을 그가 마치 광야의 선지자인 냥 외친 것이다.
전기시대가 되면서 – 이 책이 쓰인 그때는 아직 개인 컴퓨터는 꿈도 꿀 수 없는 시대였고, 개인 컴퓨터가 나오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그가 이야기한 현상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 인간의 욕망은 이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것(explosion) 이 아니라 세계를 내 안으로 응축하여 편안한 골방에서 신화의 세계를 구축하고 자신의 우주에 거주하는 것(implosion)이 되었다. 그의 생각은 어떤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그 어떤 사람들은 이를 테면 자유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나 낭만주의자들이었다. 초기 해커들은 자유와 낭만이 가득 찬 세계를 기대할 수 있었다. 인터넷은 그 해커들에 의해 구축된 세계이다. 맥루한은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기업의 출현을 걱정했는데 지금의 현실은 불행히도 그가 염려한 상태가 되었다. AI나 사물인터넷 같은 기술의 출현에 따른 사회현상들도 여러 가지 대입하여 생각해 볼만한 구절들이 많이 있고 그런 구절들을 찾아보고 음미하는 것도 책을 읽는 재미가 될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의 편집자는 기존의 생각들과 80%나 다르기 때문에 이 책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10%쯤 달라야 책이 팔릴 것이고, 출판사의 입장에서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인데, 너무 달라서 읽히지 못하고 묻혀버릴 것으로 예상했다는 에피소드이다. 어떻게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하면서 읽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이고,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60년 전에 오늘의 인터넷 시대의 사회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면, 그가 생각한 방식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앞으로 60년을 예상하는 데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시대를 선도하고자 하는 경영자와 예술가에게 이 책은 기회의 책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가 접하던 책들과 다르다. 인용되는 내용의 대부분이 아포리즘과 은유적 문장이다. 크게 어려운 학술 용어가 나타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저자가 무슨 생각을 전하려고 하는지 분명한 문장은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분명한데 우리의 관습 석인 이해 방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느낌이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서술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가 언어학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언어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를 테면,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언어학자에게 언어는 존재가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존재한 생각의 원천이며 서사적 결과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면 언어는 존재 자체이며 존재 이전이라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벽돌이라는 말과 같다.
그의 서술은 기존의 책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형태와도 다르다. 일반적인 연구서적들은 용어를 정의하고 용어가 생겨난 배경과 맥락을 설명한 후에, 그 용어를 사용하여 대상의 의미와 특성을 실증적으로 설명하거나 논리적으로 연결해 나가는 방식이다. 그와 달리 맥루한은 연구 대상인 인간 존재에 대한 이미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고 세계와 존재의 ‘관계’ 이미지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지금에 와서는 많이 사용하는 ‘카톡’ 같은 채팅을 둘이 아닌 혼자 하고 있는 모습, 일종의 독백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비슷하다.
‘카톡’을 할 때 우리는 서간문이나 감상문, 논문과 다른 형태의 표현을 한다. 조금 더 구어체에 가깝고 이모티콘 같은 상징을 사용하며, 대상에 대한 서술보다는 대상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이야기한다. 하나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다소 무례하므로 – 맥루한의 표현을 따르면 너무 핫하기 때문에 – 그 생각으로부터 떠오르는 많은 파생의 생각들을 이야기한다. 맥루한의 표현을 빌리면 대화는 전화보다, 전화는 채팅보다, 채팅은 편지보다, 편지는 책 보다 좀 더 쿨하다. 그는 책을 채팅처럼 쿨하게 썼다. 우리가 일상의 대화에서 그러하듯 대상에 대한 정의는 암시할 뿐,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그가 이러한 서술방식을 사용한 이유는 아마도 그의 미디어론에 나오는 쿨한 방식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짐작을 한다. 아니면 맥루한 스스로가 이미 쿨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일반적인 책을 읽는 것처럼 접근하면 당혹스럽고, 쉽게 포기하게 된다. 앞이 있어 뒤가 있고, 뒤로 가면 더 큰 이미지가 점점 모양을 드러내는 느낌이 아니다. 맥루한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은 분명하게 있으나 독자가 스스로 완성해야 하는 부분이 크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고려할 만한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그가 이야기하는 의미는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인데, 표현방식 때문에 피상적인 이야기로 치부될까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그의 책은 인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를 설명하려는 많은 인문학과 경영서적에서 맥루한이 이야기했거나 암시한 내용들이 나타난다. 현재 시대를 분석하는 다른 분야의 책들에도 이미 맥루한이 암시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인용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생각은 인용하기 쉽지 않다. 그가 이야기한 새로운 시대는 우리가 우리의 원인이자 결과인 시대이고, 씨를 뿌리지만 열매를 직접 거둘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니 어쩌겠는가.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이 책에서 영감을 얻고 스스로 열매를 맺기 바란다.
1부의 마지막인 ‘도전과 붕괴’의 챕터에서, 맥루한은 미디어의 출현에 따른 감각마비의 상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예술가적 역할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예술가는 우리가 연상하는 거장의 모습을 한 예술가가 아니다. 기존의 예술감상과 예술 제작 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현대의 경영자의 모습이나 골목상권의 젊은 주인들 모습에 더 가깝다. 실제로 많은 예술적 표현과 예술가들이 디자인과 디자이너, 코디네이터라는 이름으로 산업 내부로 편입되었다. 현대의 경영자는 더 이상 관리자의 모습이 아니고 환경을 이해하고 기업을 변화시키는 기획자, 예술가의 모습에 가깝다, 현대의 예술가도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 만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의 작품과 세계의 관계를 홍보하는 프로모터의 자질을 가지고 있거나 그런 파트너와 함께해야 이름을 알릴 수 있다.
그에게 예술가란 자신의 행동과 기술이 갖는 함의를 파악하고 통합하는 정신의 소유자이다. 그는 우리가 어느 분야에 있던 스스로 기능인이거나 전문인이 아니라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회의 변화는 늘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를 현재적으로 해석하거나 현재의 연장으로 미래를 예측해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술가는 과거를 해석하거나 미래의 희망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의 사태를 ‘지각’하고 스스로 ‘의지’를 펼치는 사람이다. 맥루한은 예술가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고 주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기술이 바뀌면 감각이 바뀌고, 감각이 바뀌면 가치가 바뀌고, 가치가 바뀌면 권력과 사회도 바뀐다. 사회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내면 사이클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과학은 천재가 아니라 열린 사회가 만들어 낸다. 천재는 새로운 과학을 표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경영자와 예술가는 이 거대한 사이클의 한 부분에 참여하는 존재이다. 스스로 이 사이클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럴 수 있을 때, 경영자와 예술가는 사회와 역사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자각을 할 수 있고, 사회의 성실한 구성원이면서도 사회와 소통하는 실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그 실천의 한 가지 시작일 것이라고 믿는다.
- 다음에는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소개합니다.
마셜 맥루언 지음 | 김성기, 이한우 옮김 | 민음사 펴냄
나는 지금까지 읽은 모든 책 중에서 이 책만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은 책이 없다. 이 칼럼을 쓰기 위해 20년 만에 다시 읽는 지금도 그 당시의 설렘과 흥분을 다시 느끼고 상기한다.
마샬 맥루한은 인문학의 ‘록스타’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그의 미디어론을 읽으면 왜 그런 명칭이 붙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미디어론은 미디어에 대한 연구이지만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새로운 이해, 사물의 새로운 의미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가 ‘율법으로 가득 찬’ 상호 규율의 세계에서 ‘사랑으로 자신을 구현하는’ 주체적 존재의 세계로 나아가라고 설파하는 모습을 연상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맥루한의 생각을 읽고 우리가 느끼는 지적 흥분은 그가 존재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점은 도구를 만드는 인간이 갖고 있는 ‘가능성’과 ‘위험’을 새롭게 열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펑키하고 쿨하다. 우리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쿨하게 강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만일 우리가 시대의 가치를 이해하고 현상을 예견하며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싶은 예술가이거나 경영자라면 그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한다. 그의 생각은 이해하기 까다롭지만 받아들이게 되면, 시대를 이해해야 하는 예술가와 경영자에게는 수없이 많은 가능성의 문을 여는 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미디어의 이해는 1부와 2부로 되어있다. 1부는 말 그대로 미디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2부는 여러 가지 미디어가 어떻게 우리에게 작용하고 우리를 바꾸었는가에 관한 에세이 같은 것이지만 더 전문적인 배경지식을 필요로 한다. 맥루한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부를 읽는것으로 충분하고 – 1부는 고작 100P를 조금 넘는다. – 2부에서는 개인적인 관심이 가는 부분만 읽어도 좋다. 2부를 자신의 생각으로 채워 넣는 것도 좋은 독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 책을 출간한 것은 1964년, 지금부터 약 60년 전이라는 것도 의식하면서 읽으면 좋겠다. 지금부터 60년쯤 전인데, 그가 전기시대의 인간과 사회를 묘사한 것이 현재 인터넷 시대를 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도 놀라운 경험이 될 것이다. 서구의 60년대는 한국의 70년대쯤 되는 시대이다. TV와 고속도로, 포드자동차, 로큰롤과 트위스트, 호크니와 로스코 정도가 서구문화의 대표쯤 되고, 우리나라는 초가집 지붕개량을 포함한 새마을 운동이 한참인 시대이다. 그 시대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40년이 지난 인터넷 시대의 개인과 산업, 사회현상을 보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그가 40~50년 후를 예견할 수 있었다면, 그의 생각을 이해하면 우리도 40~50년을 예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다.
‘미디어의 이해’는 주의 깊게 읽어도 은유와 경구가 많고, 언어학자답게 단어와 문장에 스며 있는 오래된 생각들을 암시하면서 미디어를 설명한다. 일반적인 책처럼 객관적인 서술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이미 모호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미디어의 의미를 전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므로 그의 책을 요약하기는 어렵고 소개하는 사람마다 약간 다른 이야기를 전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을 이해하면, 시대를 이해하고 소통해야 하는 경영자와 예술가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기대와 함께 ‘미디어의 이해’의 핵심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미디어는 메시지다.
우리는 흔히 TV나 인터넷처럼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를 미디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미디어의 전달하는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보수언론을 읽는 사람과 진보성향 언론을 접하는 사람은 그 기사 때문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성향을 더 심화시킨다고 생각한다. 맥루한은 우리가 미디어로부터 영향받는 가장 큰 부분은 콘텐츠가 아니고 미디어 자체라고 말한다. 신문을 통해 세계를 읽는 사람과 SNS를 통해 세계를 읽는 사람의 차이는 보수와 진보신문을 읽는 사람들 간의 차이보다 훨씬 크게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맥루한이 말하는 미디어는 정보매체를 이야기한다기보다 인간이 만들어 내고 있는 모든 사물, 혹은 그 사물을 만들어 내는 과학과 기술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내고 사용하는 미디어의 내용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에 의해 변하는 존재이다.
미디어는 핫(hot)하거나 쿨(cold)하다.
미디어(사물)는 우리가 맥락을 채워야 의미와 기능이 완성된다. 사실 모든 사물은 인간의 참여가 있어야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우리가 콘텐츠의 많은 부분을 채워 넣지 않아도 되는 미디어는 핫한 미디어이다. 우리가 전해지는 내용의 의미를 자기 스스로 완성해야 하는 것들은 쿨한 미디어이다. 전기 시대(인터넷 시대)는 핫한 미디어보다 쿨한 미디어를 만들어 내는 시대이다.
핫한 미디어는 사용자의 참여가 많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인간이 내적 완성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다. 주어진 목적을 위해 전문화와 제도화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갈 수 있다. 따라서 탈부족화한 평균적이고 전문화된 모던 사회를 만들어 낸다. 쿨한 미디어는 정보량이 적고 순간적이기 때문에 사용자의 순간적인 참여를 반복한다. 순간의 전체적인 완성, 존재의 서사적 자각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기계시대에서 전기 시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은 점점 진리를 잃어버리고 각자의 신화를 만들어 가는 존재가 된다. 중심을 상실한 포스트모던 사회를 그가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그의 생각에 따르면 포스트 모던한 사회는 필연적이다.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며 인간의 확장은 감각의 마비를 일으킨다.
그의 어록 중에 인상 깊은 말은 ‘인간은 테크놀로지의 성기에 불과하다’가 있다. 인간이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테크놀로지가 만들어 낸 미디어에 의해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는 말단의 메커니즘에 불과하다고 강조한 말이다. 새로운 미디어를 만났을 때, 우리는 그 미디어가 내포하고 있는 인간 감각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 변화가 다시 우리에게 새로움을 만들어 내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새로움을 만들어 내기 전에 우리는 감각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각의 마비를 경험하게 되는데, 감각의 마비는 우리에게 무의식과 무감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분열된 자아의 상태로 이끈다. 감각의 마비를 벗어나는 것은 여러 미디어의 수용과 결합을 통해 가능하다. 감각의 마비를 안전하게 벗어날 때 우리의 감각은 확장된다. 그가 이 부분에서 이야기하는 감각마비의 사회현상은 오늘의 우리 사회와 매우 흡사하다.
미디어는 적극적인 은유이다.
맥루한은 인간이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다른 존재로 바꾸거나 바뀌는 과정을 은유가 하는 일과 같다고 했다. 경험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파괴와 혼돈으로 보일 때, 우리는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그 사태의 전체적인 이해를 하고 사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되돌아 간다. 유머와 속담이 우리에게 통찰력을 주거나 편안하게 하는 것과 동일하다. 미디어는 우리의 경험을 은유적으로 변환(translation)시키는 결과이고 과정이다. 그는 첫 번째 미디어의 예로서 언어를 설명하면서, 언어가 기능하게 된 처음에 인간이 세계에 대해 가지게 된 주도적인 상태(grasp), 그래서 세계를 놓아줄 수 있었던 상황을 예로 들었다. 우리가 새로운 미디어(사물)를 만들어 내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이 단편적으로 전하는 그의 생각이다. 당연히 그의 책은 이보다 훨씬 많은 의미와 재미를 갖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쿨한 태도, 펑키한 스타일을 책을 읽으면서 느껴보기 바란다. 실제로 그가 이 책을 발간하고 많은 비난과 찬사를 받았는데, 실제 라디오 등의 인터뷰에서도 거침없고 희한한 말들, 하지만 정말 그렇겠는데 하는 공감을 일으키는 사회 분석 들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는 인간이 가지는 인식과 이해의 시작점에 감각이 있다는 당연한 가설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그리고 시각, 청각, 촉각과 같은 감각이 고정된 체계가 아니고 우리의 환경에 의해 재배치되는 것이라는 체험적인 사실에 주목한다. 현대인의 감각은 기술과 사물에 의해, 다시 말하면 미디어에 의해 재배치되는 다이내믹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설파한다. 인간의 감각이 그런 것이라면 기계에서 전기로 넘어가는 시대는 좀 더 빨라지고 좀 더 편하고 재미있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도구를 만들고 도구를 이용하는 인간이 도구에 의해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는 그의 생각은 우리가 우리의 근원이며 결과라는 것을 암시한다. 감각마비의 시대에서도 깨어있는 인간에게 세계는 두렵기만 한 것도 아니고 자만할 만한 것도 아니라고 속삭인다.
과학과 기계가 구축하는 성과로 이루어진 산업화의 근대는 자만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시대였다. 기계로 세상을 개척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기술을 선점한 국가는 확장의 욕구를 실행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산업화의 막바지에 이른 근대는 세계대전과 제국주의가 당연하고 가능한 시대였다. 그것은 로마가 세계를 정복한 이래로 수 천년 동안 일관된 세계의 목표였다. 그런데 이제 전기의 시대가 왔고, 인간은 정복과 피정복의 세계에서(explosion) 다른 새로운 시대로 이전했다는 것(implosion)을 그가 마치 광야의 선지자인 냥 외친 것이다.
전기시대가 되면서 – 이 책이 쓰인 그때는 아직 개인 컴퓨터는 꿈도 꿀 수 없는 시대였고, 개인 컴퓨터가 나오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그가 이야기한 현상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 인간의 욕망은 이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것(explosion) 이 아니라 세계를 내 안으로 응축하여 편안한 골방에서 신화의 세계를 구축하고 자신의 우주에 거주하는 것(implosion)이 되었다. 그의 생각은 어떤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그 어떤 사람들은 이를 테면 자유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나 낭만주의자들이었다. 초기 해커들은 자유와 낭만이 가득 찬 세계를 기대할 수 있었다. 인터넷은 그 해커들에 의해 구축된 세계이다. 맥루한은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기업의 출현을 걱정했는데 지금의 현실은 불행히도 그가 염려한 상태가 되었다. AI나 사물인터넷 같은 기술의 출현에 따른 사회현상들도 여러 가지 대입하여 생각해 볼만한 구절들이 많이 있고 그런 구절들을 찾아보고 음미하는 것도 책을 읽는 재미가 될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의 편집자는 기존의 생각들과 80%나 다르기 때문에 이 책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10%쯤 달라야 책이 팔릴 것이고, 출판사의 입장에서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인데, 너무 달라서 읽히지 못하고 묻혀버릴 것으로 예상했다는 에피소드이다. 어떻게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하면서 읽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이고,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60년 전에 오늘의 인터넷 시대의 사회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면, 그가 생각한 방식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앞으로 60년을 예상하는 데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시대를 선도하고자 하는 경영자와 예술가에게 이 책은 기회의 책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가 접하던 책들과 다르다. 인용되는 내용의 대부분이 아포리즘과 은유적 문장이다. 크게 어려운 학술 용어가 나타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저자가 무슨 생각을 전하려고 하는지 분명한 문장은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분명한데 우리의 관습 석인 이해 방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느낌이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서술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가 언어학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언어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를 테면,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언어학자에게 언어는 존재가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존재한 생각의 원천이며 서사적 결과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면 언어는 존재 자체이며 존재 이전이라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벽돌이라는 말과 같다.
그의 서술은 기존의 책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형태와도 다르다. 일반적인 연구서적들은 용어를 정의하고 용어가 생겨난 배경과 맥락을 설명한 후에, 그 용어를 사용하여 대상의 의미와 특성을 실증적으로 설명하거나 논리적으로 연결해 나가는 방식이다. 그와 달리 맥루한은 연구 대상인 인간 존재에 대한 이미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고 세계와 존재의 ‘관계’ 이미지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지금에 와서는 많이 사용하는 ‘카톡’ 같은 채팅을 둘이 아닌 혼자 하고 있는 모습, 일종의 독백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비슷하다.
‘카톡’을 할 때 우리는 서간문이나 감상문, 논문과 다른 형태의 표현을 한다. 조금 더 구어체에 가깝고 이모티콘 같은 상징을 사용하며, 대상에 대한 서술보다는 대상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이야기한다. 하나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다소 무례하므로 – 맥루한의 표현을 따르면 너무 핫하기 때문에 – 그 생각으로부터 떠오르는 많은 파생의 생각들을 이야기한다. 맥루한의 표현을 빌리면 대화는 전화보다, 전화는 채팅보다, 채팅은 편지보다, 편지는 책 보다 좀 더 쿨하다. 그는 책을 채팅처럼 쿨하게 썼다. 우리가 일상의 대화에서 그러하듯 대상에 대한 정의는 암시할 뿐,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그가 이러한 서술방식을 사용한 이유는 아마도 그의 미디어론에 나오는 쿨한 방식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짐작을 한다. 아니면 맥루한 스스로가 이미 쿨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일반적인 책을 읽는 것처럼 접근하면 당혹스럽고, 쉽게 포기하게 된다. 앞이 있어 뒤가 있고, 뒤로 가면 더 큰 이미지가 점점 모양을 드러내는 느낌이 아니다. 맥루한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은 분명하게 있으나 독자가 스스로 완성해야 하는 부분이 크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고려할 만한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그가 이야기하는 의미는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인데, 표현방식 때문에 피상적인 이야기로 치부될까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그의 책은 인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를 설명하려는 많은 인문학과 경영서적에서 맥루한이 이야기했거나 암시한 내용들이 나타난다. 현재 시대를 분석하는 다른 분야의 책들에도 이미 맥루한이 암시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인용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생각은 인용하기 쉽지 않다. 그가 이야기한 새로운 시대는 우리가 우리의 원인이자 결과인 시대이고, 씨를 뿌리지만 열매를 직접 거둘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니 어쩌겠는가.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이 책에서 영감을 얻고 스스로 열매를 맺기 바란다.
1부의 마지막인 ‘도전과 붕괴’의 챕터에서, 맥루한은 미디어의 출현에 따른 감각마비의 상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예술가적 역할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예술가는 우리가 연상하는 거장의 모습을 한 예술가가 아니다. 기존의 예술감상과 예술 제작 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현대의 경영자의 모습이나 골목상권의 젊은 주인들 모습에 더 가깝다. 실제로 많은 예술적 표현과 예술가들이 디자인과 디자이너, 코디네이터라는 이름으로 산업 내부로 편입되었다. 현대의 경영자는 더 이상 관리자의 모습이 아니고 환경을 이해하고 기업을 변화시키는 기획자, 예술가의 모습에 가깝다, 현대의 예술가도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 만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의 작품과 세계의 관계를 홍보하는 프로모터의 자질을 가지고 있거나 그런 파트너와 함께해야 이름을 알릴 수 있다.
그에게 예술가란 자신의 행동과 기술이 갖는 함의를 파악하고 통합하는 정신의 소유자이다. 그는 우리가 어느 분야에 있던 스스로 기능인이거나 전문인이 아니라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회의 변화는 늘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를 현재적으로 해석하거나 현재의 연장으로 미래를 예측해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술가는 과거를 해석하거나 미래의 희망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의 사태를 ‘지각’하고 스스로 ‘의지’를 펼치는 사람이다. 맥루한은 예술가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고 주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기술이 바뀌면 감각이 바뀌고, 감각이 바뀌면 가치가 바뀌고, 가치가 바뀌면 권력과 사회도 바뀐다. 사회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내면 사이클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과학은 천재가 아니라 열린 사회가 만들어 낸다. 천재는 새로운 과학을 표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경영자와 예술가는 이 거대한 사이클의 한 부분에 참여하는 존재이다. 스스로 이 사이클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럴 수 있을 때, 경영자와 예술가는 사회와 역사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자각을 할 수 있고, 사회의 성실한 구성원이면서도 사회와 소통하는 실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그 실천의 한 가지 시작일 것이라고 믿는다.
- 다음에는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