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만큼 행복한 것이 있을까?
게다가, 작게만 여겼던 나의 재능이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사람은 의외로 나의 개인적인 즐거움보다, 나로 인한 타인의 행복에 더 큰 행복감을 느낀다.
이런 이유로 나만의 여행을 하던 내가 ‘누군가를 위한 여행’을 결심했다.
앞으로 할 이야기는 조금 특별한 이유로 히말라야에 가게 된 나의 이야기다.
히말라야가 나를 부른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고생, 대학생, 그리고 나이 지긋한 어른들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어울려 매년 히말라야에 가는 팀이 있다. 바로 ‘히말라야 오지 학교 탐사대’다. 청소년과 선생님들로 이루어진 이 팀은 매년 히말라야의 다양한 지역을 탐사하며 자신의 한계를 넘는 도전을 하고, 탐사 후에는 네팔의 열악한 학교에 방문해 나눔 활동을 한다. 매년 지원물품을 전달하고 문화교류활동을 하던 탐사대는 14년 차, 학교에 벽화를 그리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팀을 이끄는 김영식 대장님이 내게 제안했던 것이다. 팀에 합류해서 학교에 예쁜 벽화를 선물해보자고. 나의 직업은 벽화가, 나의 재능을 단지 밥벌이 수단으로만 쓰던 게 영 못 마땅했었다. ‘무언가 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 없을까?’라고 궁리하던 차였다. 거절할 이유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팀이 나를 필요로 했다. 네팔의 학교가 나의 재능을 필요로 했다. 히말라야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랑탕 트레킹 시작점, 샤브로벤시로 가기 위해서는 미니버스에 몸을 구겨넣고 8시간동안 절벽길을 달려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 랑탕
히말라야 오지학교 탐사대로 히말라야를 가게 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이번에는 네팔 최초의 국립공원인 랑탕으로 향했다. 네팔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별명을 가진 랑탕은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트레킹을 하는 내내 들리는 청량한 계곡 소리, 깊은 산골짜기를 타고 바라다 보이는 첩첩의 산 그리메, 산골짜기 깊숙이 사는 따망족 여인과 아이들의 크고 빛나는 눈망울. 좀처럼 다른 트레커를 마주칠 수 없는 고요함과 호젓함은 이 길은 순수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렇게 개울과 우거진 숲, 그리고 너덜지대를 걷기 이틀째. 돌연 새하얗고 반짝이는 것이 시선을 강탈했다. 그 정체는 바로 ‘랑탕리룽(7234m)’. 새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하얀 설산은 심장을 미친 듯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모여 내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했다.
‘과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구나!’
랑탕 코스의 흔한 풍경
(좌) 랑탕 코스 풍경 (우) 트레킹 이틀째, 하얗게 빛나는 설산 랑탕리룽이 시선을 빼앗는다.
그림으로 응원하다
랑탕이 특별한 이유는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 곳에서 일어났던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2015년, 이 일대를 집어삼킨 자연재해가 있었다. 대지진이었다. 대지진으로 인한 산사태는 많은 트레커들의 쉼터가 되던 랑탕 빌리지를 집어삼켰고, 순식간에 수백 명의 마을 주민들과 관광객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단 한 채의 집만이 남겨졌다고 한다. 비통한 이야기였다. 랑탕에 도착했을 때, 마음이 더더욱 무거워졌다. 내가 밟고 있는 이 회색 빛깔 돌무더기 땅 아래 아직도 많은 이들이 묻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앗아갈 것만 같았던 대지진 후에도 그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문득 마주한 사람들의 미소는 여전히 따스했다. 어쩌면 나야말로 그들의 삶을 슬픔이라는 필터를 낀 채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 곳에 필요한 것은 슬픈 시선, 동정 어린 마음이 아니라 이전과 같은 태도와 마음속으로 외치는 고요한 응원이 아닐까.
(좌) 랑탕빌리지를 향해서 꾸준히 걷는 히말라야오지학교탐사대 대원들 (우) 지진 피해자 추모비와 랑탕리룽
종이와 붓을 꺼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곳에 있었던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리고 나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삶에 조용히 응원을 보내는 일이었다. 하얀 설산과 함께 이 곳에 묻힌 이들을 위한 추모비를 작은 종이에 한가득 담았다. 반짝이는 랑탕리룽 아래서 따사로운 햇살을 받는 랑탕마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랑탕리룽과 추모비를 종이 한장에 담다.
생애 최고점, 간잘라 피크
산을 좋아하기 시작했던 시절, ‘나는 산악인이 되고 싶은 걸까?’ 싶었다. 높은 곳이 주는 두근거림이 좋았다. 그 높이가 가슴을 뛰게 했고, 극한의 힘듦 후 다가오는 성취감이, 말로는 설명 못할 그 심장의 박동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아니 정확히는 점점 잊혀졌다. 트레킹을 통한 여행이 즐거웠고, 호젓한 자연 속에서 선물 받는 감동과 치유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머지않아 그 생각을 다시 뒤집는 기회가 왔다. 붉게 타오르는 하늘 아래, 나는 지금 간잘라 피크 앞에 매달려 있다.
히말라야 오지학교 탐사대 중 등반팀은 랑탕 코스에 위치한 한 봉우리, 간잘라 피크를 등반할 예정이었다. 정상 공격 날, 자정부터 걷기 시작했다. 사방은 어두워서 앞사람의 발꿈치만 보였다.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발짝 한 발짝 내딛고, 잠시 멈춰 가쁜 숨을 몰아 쉬고, 다시 내딛기를 몇 시간이나 반복했을까. 다리의 감각과 함께 시간에 대한 감각도 무뎌져 가던 그때, 해가 떠오르고 있다. 붉은빛이 칠흑 같은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걸어와서 몰랐었다. 그런데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가파른 곳에 매달려 있었다니! 가파르고 날카로운 능선 위에 서있는 나의 왼쪽 편으로는 단단한 청빙과 크레바스가, 오른쪽으로는 직벽의 낭떠러지가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자일에 매달려 고군분투하고 있는 청소년과 어른 대원들이 보였다. 온몸에 힘이 풀렸다. 젖은 빨래 마냥 늘어진 나의 비루한 육신을 붙잡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 자일 하나뿐이었다.
(좌) 간잘라피크 정상을 코 앞에 두고. 붉은 빛이 칠흑같은 어둠을 몰아내며 세상을 밝히고 있다. (우) 정상을 향해 고군분투중인 히말라야오지학교탐사대원들
간잘라 피크까지는 30미터 남짓 남았는데, 먼저 도착한 대장님과 셰르파가 나를 코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바로 눈 앞이 정상인데! 10걸음만 더 가면 되는데! 무력함을 느꼈다. 5600m의 높이 때문인지 정신은 몽롱했다.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 후로 어떻게 올라갔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건, 그저 30미터를 그렇게 천천히 걸어 본 적은 처음이라는 사실과, 무종교인 내가 하느님, 예수님, 시바신님, 알라신님 등 세상에 온갖 신들을 향해 울부짖었다는 것!
히말라야의 신이 이런 나를 갸륵하게 여겼던 것일까. 내가 해냈다! 마침내 간잘라 피크에 올랐다. 힘듦과 두려움, 안도감과 환희가 한데 뭉친 감정에,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내 30년 생애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높이였다. 내 생애 최고점이자, 나의 산 인생에서 최고로 기억될 뜨거운 울림이었다.
고산증세로 구름위에 떠있는 듯 몽롱한 기분으로, 정상을 향해 한발짝 한발짝 내딛고 있다.
벽화를 통해 나눈 꿈
약 열흘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마치고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끝났다고 생각할 뻔했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막중한 미션이 있었다. 바로 카트만두의 바니빌라스 학교에 지원 물품 전달하고, 벽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한 시간 남짓 카트만두 시내를 달려 도착한 바니빌라스 학교의 상황은 생각보다 열악했다. 학교는 한창 공사 중이었고, 벽화를 그리기로 한 벽면 앞에는 벽돌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나 문제 될 게 없었다.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청소년과 어른 대원들은 힘을 합해 벽돌들을 하나하나 옮기고, 울퉁불퉁하고 칙칙한 시멘트에 푸른색 페인트를 얹히기 시작했다. 하늘색 바탕에 몽글몽글 하얀 구름을 그려 넣었다. 사랑스러운 동물친구들도 더하고, 생기 넘치는 무지개다리도 만들었다. 힘든 작업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힘을 모으니 벽화는 금세 채워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많은 마을 사람들, 어린이 친구들이 구경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내겐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이던 붓질이, 누군가에겐 특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학교 건물에 한가득 빛나는 벽화를 채워주고 싶었다.
(좌) 바니빌라스 학교에 그린 벽화. 벽화가 신기한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하는 네팔 꼬마 친구들 (우) 바니빌라스 학교에 그린 벽화. 함께 그린 청소년 대원들과 함께
시나브로 벽화가 완성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완성된 벽화를 보고 미소 지어주었다. 그들의 환한 미소에 힘든 기분이 씻은 듯이 사라졌고,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이 미소를 보기 위해서 먼 땅에서 이곳까지 온 거였구나! 나의 사사로운 재능이 누군가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니, 뿌듯함 이상의 행복감이 차올랐다.
‘화려한 색감으로 채워진 벽화처럼 이 벽화를 바라보는 아이들도 형형색색의 꿈을 키워나가길.’
어느새 내 마음도 꿈으로 크게 부풀었다. 언젠가 나의 벽화가 필요한 곳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겠다고. 이 것이 이 나눔을 통해 얻은 꿈이라면,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진리를 배웠다. 나눔은 반드시 돌아온다.
히말라야가 나를 부른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고생, 대학생, 그리고 나이 지긋한 어른들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어울려 매년 히말라야에 가는 팀이 있다. 바로 ‘히말라야 오지 학교 탐사대’다. 청소년과 선생님들로 이루어진 이 팀은 매년 히말라야의 다양한 지역을 탐사하며 자신의 한계를 넘는 도전을 하고, 탐사 후에는 네팔의 열악한 학교에 방문해 나눔 활동을 한다. 매년 지원물품을 전달하고 문화교류활동을 하던 탐사대는 14년 차, 학교에 벽화를 그리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팀을 이끄는 김영식 대장님이 내게 제안했던 것이다. 팀에 합류해서 학교에 예쁜 벽화를 선물해보자고. 나의 직업은 벽화가, 나의 재능을 단지 밥벌이 수단으로만 쓰던 게 영 못 마땅했었다. ‘무언가 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 없을까?’라고 궁리하던 차였다. 거절할 이유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팀이 나를 필요로 했다. 네팔의 학교가 나의 재능을 필요로 했다. 히말라야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랑탕 트레킹 시작점, 샤브로벤시로 가기 위해서는 미니버스에 몸을 구겨넣고 8시간동안 절벽길을 달려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 랑탕
히말라야 오지학교 탐사대로 히말라야를 가게 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이번에는 네팔 최초의 국립공원인 랑탕으로 향했다. 네팔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별명을 가진 랑탕은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트레킹을 하는 내내 들리는 청량한 계곡 소리, 깊은 산골짜기를 타고 바라다 보이는 첩첩의 산 그리메, 산골짜기 깊숙이 사는 따망족 여인과 아이들의 크고 빛나는 눈망울. 좀처럼 다른 트레커를 마주칠 수 없는 고요함과 호젓함은 이 길은 순수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렇게 개울과 우거진 숲, 그리고 너덜지대를 걷기 이틀째. 돌연 새하얗고 반짝이는 것이 시선을 강탈했다. 그 정체는 바로 ‘랑탕리룽(7234m)’. 새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하얀 설산은 심장을 미친 듯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모여 내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했다.
‘과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구나!’
랑탕 코스의 흔한 풍경
(좌) 랑탕 코스 풍경 (우) 트레킹 이틀째, 하얗게 빛나는 설산 랑탕리룽이 시선을 빼앗는다.
그림으로 응원하다
랑탕이 특별한 이유는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 곳에서 일어났던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2015년, 이 일대를 집어삼킨 자연재해가 있었다. 대지진이었다. 대지진으로 인한 산사태는 많은 트레커들의 쉼터가 되던 랑탕 빌리지를 집어삼켰고, 순식간에 수백 명의 마을 주민들과 관광객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단 한 채의 집만이 남겨졌다고 한다. 비통한 이야기였다. 랑탕에 도착했을 때, 마음이 더더욱 무거워졌다. 내가 밟고 있는 이 회색 빛깔 돌무더기 땅 아래 아직도 많은 이들이 묻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앗아갈 것만 같았던 대지진 후에도 그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문득 마주한 사람들의 미소는 여전히 따스했다. 어쩌면 나야말로 그들의 삶을 슬픔이라는 필터를 낀 채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 곳에 필요한 것은 슬픈 시선, 동정 어린 마음이 아니라 이전과 같은 태도와 마음속으로 외치는 고요한 응원이 아닐까.
(좌) 랑탕빌리지를 향해서 꾸준히 걷는 히말라야오지학교탐사대 대원들 (우) 지진 피해자 추모비와 랑탕리룽
종이와 붓을 꺼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곳에 있었던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리고 나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삶에 조용히 응원을 보내는 일이었다. 하얀 설산과 함께 이 곳에 묻힌 이들을 위한 추모비를 작은 종이에 한가득 담았다. 반짝이는 랑탕리룽 아래서 따사로운 햇살을 받는 랑탕마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랑탕리룽과 추모비를 종이 한장에 담다.
생애 최고점, 간잘라 피크
산을 좋아하기 시작했던 시절, ‘나는 산악인이 되고 싶은 걸까?’ 싶었다. 높은 곳이 주는 두근거림이 좋았다. 그 높이가 가슴을 뛰게 했고, 극한의 힘듦 후 다가오는 성취감이, 말로는 설명 못할 그 심장의 박동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아니 정확히는 점점 잊혀졌다. 트레킹을 통한 여행이 즐거웠고, 호젓한 자연 속에서 선물 받는 감동과 치유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머지않아 그 생각을 다시 뒤집는 기회가 왔다. 붉게 타오르는 하늘 아래, 나는 지금 간잘라 피크 앞에 매달려 있다.
히말라야 오지학교 탐사대 중 등반팀은 랑탕 코스에 위치한 한 봉우리, 간잘라 피크를 등반할 예정이었다. 정상 공격 날, 자정부터 걷기 시작했다. 사방은 어두워서 앞사람의 발꿈치만 보였다.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발짝 한 발짝 내딛고, 잠시 멈춰 가쁜 숨을 몰아 쉬고, 다시 내딛기를 몇 시간이나 반복했을까. 다리의 감각과 함께 시간에 대한 감각도 무뎌져 가던 그때, 해가 떠오르고 있다. 붉은빛이 칠흑 같은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걸어와서 몰랐었다. 그런데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가파른 곳에 매달려 있었다니! 가파르고 날카로운 능선 위에 서있는 나의 왼쪽 편으로는 단단한 청빙과 크레바스가, 오른쪽으로는 직벽의 낭떠러지가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자일에 매달려 고군분투하고 있는 청소년과 어른 대원들이 보였다. 온몸에 힘이 풀렸다. 젖은 빨래 마냥 늘어진 나의 비루한 육신을 붙잡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 자일 하나뿐이었다.
(좌) 간잘라피크 정상을 코 앞에 두고. 붉은 빛이 칠흑같은 어둠을 몰아내며 세상을 밝히고 있다. (우) 정상을 향해 고군분투중인 히말라야오지학교탐사대원들
간잘라 피크까지는 30미터 남짓 남았는데, 먼저 도착한 대장님과 셰르파가 나를 코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바로 눈 앞이 정상인데! 10걸음만 더 가면 되는데! 무력함을 느꼈다. 5600m의 높이 때문인지 정신은 몽롱했다.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 후로 어떻게 올라갔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건, 그저 30미터를 그렇게 천천히 걸어 본 적은 처음이라는 사실과, 무종교인 내가 하느님, 예수님, 시바신님, 알라신님 등 세상에 온갖 신들을 향해 울부짖었다는 것!
히말라야의 신이 이런 나를 갸륵하게 여겼던 것일까. 내가 해냈다! 마침내 간잘라 피크에 올랐다. 힘듦과 두려움, 안도감과 환희가 한데 뭉친 감정에,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내 30년 생애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높이였다. 내 생애 최고점이자, 나의 산 인생에서 최고로 기억될 뜨거운 울림이었다.
고산증세로 구름위에 떠있는 듯 몽롱한 기분으로, 정상을 향해 한발짝 한발짝 내딛고 있다.
벽화를 통해 나눈 꿈
약 열흘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마치고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끝났다고 생각할 뻔했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막중한 미션이 있었다. 바로 카트만두의 바니빌라스 학교에 지원 물품 전달하고, 벽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한 시간 남짓 카트만두 시내를 달려 도착한 바니빌라스 학교의 상황은 생각보다 열악했다. 학교는 한창 공사 중이었고, 벽화를 그리기로 한 벽면 앞에는 벽돌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나 문제 될 게 없었다.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청소년과 어른 대원들은 힘을 합해 벽돌들을 하나하나 옮기고, 울퉁불퉁하고 칙칙한 시멘트에 푸른색 페인트를 얹히기 시작했다. 하늘색 바탕에 몽글몽글 하얀 구름을 그려 넣었다. 사랑스러운 동물친구들도 더하고, 생기 넘치는 무지개다리도 만들었다. 힘든 작업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힘을 모으니 벽화는 금세 채워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많은 마을 사람들, 어린이 친구들이 구경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내겐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이던 붓질이, 누군가에겐 특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학교 건물에 한가득 빛나는 벽화를 채워주고 싶었다.
(좌) 바니빌라스 학교에 그린 벽화. 벽화가 신기한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하는 네팔 꼬마 친구들 (우) 바니빌라스 학교에 그린 벽화. 함께 그린 청소년 대원들과 함께
시나브로 벽화가 완성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완성된 벽화를 보고 미소 지어주었다. 그들의 환한 미소에 힘든 기분이 씻은 듯이 사라졌고,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이 미소를 보기 위해서 먼 땅에서 이곳까지 온 거였구나! 나의 사사로운 재능이 누군가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니, 뿌듯함 이상의 행복감이 차올랐다.
‘화려한 색감으로 채워진 벽화처럼 이 벽화를 바라보는 아이들도 형형색색의 꿈을 키워나가길.’
어느새 내 마음도 꿈으로 크게 부풀었다. 언젠가 나의 벽화가 필요한 곳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겠다고. 이 것이 이 나눔을 통해 얻은 꿈이라면,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진리를 배웠다. 나눔은 반드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