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한라산 삼각봉의 풍경을 담다

제주살이의 시작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언제든 한라산에 갈 수 있으니까.”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큰 맘 먹고 비행기 두 번 타야 다녀 올 수 있는 한라산을 언제든 갈 수 있다니! 부러워서 샘이 날 지경이다. 그런데 그런 부러운 생각이 나의 현실이 되었다. 다름 아닌 제주도 한달살이를 시작하게 된 것. 사실 제주살이의 시작은 여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글쓰기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집안에만 콕 박혀있기는 몸이 여간 근질 근질 한 게 아니다. 한라산이 애타게 날 부르는 것 만 같다. ’일주일에 한번쯤은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다가 ‘아니, 이 산 타기 좋은 계절에 한라산을 코 앞에 두고 가지 않으면 그건 죄악에 가까워!’라고 냉큼 합리화 한다. 그래서 더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이른 아침, 미리 챙겨 둔 배낭을 메고 한라산으로 향했다.


(좌) 한라산 관음사 코스, 키다리 소나무 숲 (우) 한라산 삼각봉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


본능이 말하다


한라산을 10번쯤은 다녀왔지만 이번에 향한 곳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코스, 관음사 코스다. 공기가 차다 못해 시린 새벽, 길을 나서며 들이키는 청량한 공기는 늘 기분이 좋다. 평소에 그렇게 게으름을 피워도 산에 갈 때 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하얗게 피어난 한라산의 설경을 상상하니 발걸음이 더욱 가볍다. 그런데 이게 웬걸. 관음사 입구에 도착하니 오늘 눈 구경은 그른 것 같다. 하얀색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건조한 풍경이 나를 맞아준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나는 한라산 이어서일까. 새로운 곳을 탐험할 때의 호기심과 설렘 때문일까. 눈이 없는 한라산이어도 마냥 좋았다. 좌우로 낮게 깔린 산죽길을 지나, 키다리 소나무가 쭉쭉 뻗은 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 속을 두시간 남짓 걸었을까.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걷다보니 하늘을 찌를듯한 바위가 눈 앞에 나타났다. 그 이름과 모양새가 너무나도 닮아 있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단번에 한라산 삼각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연 듣던대로 절경이었다. 우뚝 솟은 삼각봉과 사방으로 펼쳐진 겨울나무들,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드문 드문 자리한 여전히 푸른 소나무, 봉우리 우측으로 이어지는 이국적인 노란빛 들판까지. 삼각봉을 중심으로 장관의 파노라마가 펼쳐져있었다.


그래, 오늘은 바로 여기다! 본능이 내게 말했다. 오늘 한라산에서 나의 화폭에 담아야 할 곳은 바로 이곳이라고. 부지런히 올라온 덕에 시간적 여유도 있던 터였다. 그렇게 삼각봉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대피소 데크에 걸터 앉아 미니 파렛트를 펼쳤다. 그리고 본능이 말하는 대로, 나만의 방법으로 한라산의 겨울 풍경을 담기 시작했다.


한라산 삼각봉


겨울에 산 위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


사실 이 차가운 계절, 산에서 그림을 그린 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매서운 바람에 순식간에 손이 얼 뿐더러, 물을 용제로 하는 수채화를 사용하기 때문에 정말 추운 날에는 붓질을 하자마자 그대로 물감이 얼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다행히 오늘의 한라산은 그 정도의 추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손에 감각이 없어지기 전, 최대한 빠르게 풍경을 담아 내기로 한다. 스케치를 하는 시간은 단 1분. 종이 한 가운데에 삼각봉을 그려넣고, 원경과 근경의 영역을 표시한 후 바로 채색은 시작된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그리세요?”


그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내게 사실 하이킹아트는 완성도 있는 풍경화나 정밀화라기 보다는 풍경 크로키에 가깝다. ‘사실적이기 보다는 자연 속에서 바라보는 풍경, 색감, 바람결, 때로는 빛, 때로는 향을 느끼고, 내가 바라보는 풍경의 순간의 인상을 담아내는 것’이다. 잘 그려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던지고, 자연을 또 다른 방식으로 음미하고 표현한다고 생각하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삼각봉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30분동안 한라산의 풍경은 한결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바위의 모양새, 질감, 나무가지가 뻗쳐있는 방향성, 각각의 식생이 가진 특유의 색감 등, 평소에 무심코 지나칠 법한 것들을 더욱 세세하게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더욱 재미있는 건, 내가 한번 그려본 풍경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추운 겨울에도 나는 그림 그리기를 포기할 수 없나보다. 그런 마음을 기특하게 생각했는지 삼각봉 위로 하늘이 열리며 따사로운 햇볕이 넘어오고 있었다. 


한라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이국적인 풍경


(좌) 눈은 없지만 아름다운 한라산 정상 (우) 운해가 가득한 신비로운 한라산


언제나 한라산은 옳다


30분간의 달콤한 시간 끝, 슬슬 몸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삼각봉을 지나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림은 미완성이지만 충분했다. 나만의 한라산을 담을 수 있었으니까. 삼각봉 대피소를 지나면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식생과 이국적인 풍경을 바라보니 연신 감탄이 나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이 곳이 우리나라라니!’


흔히 보던 한국산과는 다른 낯선 색감과 풍경을 품고 있었지만 이 곳은 틀림없이 우리나라가 맞았다. 한라산 트레킹을 즐기는 해외 트레커를 보며 자랑스럽고 뿌듯한 마음이 한 가득 들기도 했다. 길이 더욱 가파라진다는 건 정상에 가까워져 감을 의미한다. 숨을 헐떡이며 깔딱고개를 오르다 보니 어느덧 나는 구름 위를 걷고 있었고, 마침내 올라선 한라산 정상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불지만, 백록담이라는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품은 한라산.


4시간 30분간의 끊임 없는 오름질 끝에 도달한 이 곳. 이 곳에 올라서기 까지의 노력이 결코 가볍지 않았기에 그 끝이 더욱 감격스러운지도 모른다. 한라산 코스 중 관음사 코스가 가장 힘든 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풍경이라면, 이런 아름다움이라면 언제든 이 길을 다시 걷고 싶다.


상상했던 설경을 만나지 못해 실망할 법도 했던 한라산 산행에서 단 한조각의 아쉬움도 없었던 이유는, 어떤 계절이든 어떤 날씨이든 한라산은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