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놀드 하우저

아놀드 하우저 저 | 반성완, 염무웅, 백낙청 역 | 창비 | 사진 제공: 예스24


1953년 독일에서 출간된 이 책이 한국에서 번역된 것은 1966년 ‘창작과 비평’의 연재를 통해서이다. 4권으로 된 전권이 책으로 출간된 것은 그 후 십 년이 지난 1976년이다. 출간 후 잠시 동안 이 책은 금서목록에 올랐던 일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급진적인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을 언급하는 내용이 아니지만, 제목에 사회사가 들어있다거나, 저자가 그 당시 공산권이었던 헝가리 출생이라거나, 번역자들이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한 창작과 비평의 주간이었다는 등의 이유로 검열자의 주목을 끌었고, 검열자는 이 책을 읽어보지도 않은 것이 이유일 것이다. 


이 책에는 사회 비판적인 내용이 없다. 그럼에도 전체주의적 사회의 금서목록에 올랐던 적이 있다는 것은 잠깐의 에피소드이지만 상징적 의미가 있다. ‘금서 사건’은 이를테면 모던과 포스트 모던의 충돌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이 묘사하는 세계에는 유명한 예술가와 예술품이 있지만 위대한 개인도 위대한 사회도 없고, 위대한 작품을 잉태한 사회와 개인들의 역동적인 모습이 있을 뿐이다. 위대한 예술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구조와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어떻게 인간이 예술로부터 위대함을 읽어 내게 되었는가를 작가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서술한다. 저자는 위대한 예술의 아우라에 눌리지 않고 그 작품의 완성 이전에 사회와 개인이 어떻게 역동적으로 작용했는지를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으면,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만났을 때에도 그 작품이 주는 감동과 함께 그 작품이 탄생하기 전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인간들의 모습과 사회의 구조를 연상할 수 있고, 예술품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가치에만 몰입하지 않으면서 그 작품이 이야기하는 그 사회와 작가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술을 보는 어떤 태도를 알려준다. 이 것이 이 책을 소개하는 한 가지 이유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품과 예술가에 대한 방대한 해설을 담고 있다. 예술에 문외한이라면,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한담의 자리에서 한마디 언급해도 예술에 대해 약간의 소양은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교양서로는 다소 버거운 것이 사실이지만 서가에 꽂아두고 작가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그 작가를 찾아보면 약간의 상식- 일반적인 수준보다는 높은- 을 얻는 재미를 느낄 수 도 있다. 색인을 찾으면 아마도 수백 명 혹은 약 천명쯤(?)의 작가에 대한 작품 해설과 동시대 작가들의 이름, 동시대의 사회 분위기 정도는 알 수 있으니 교양서로는 사실 꽤 괜찮은 책이다.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서양미술에 대한 백과사전식 해설이라면, 이 책은 아놀드 하우저의 정치경제적 관점에 입각한 예술 비평서이다. 곰브리치의 책은 읽기 쉽고, 읽으면 약간의 상식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읽기 어렵고 읽으면 예술에 대한 어떤 관점, 정치경제적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아놀드 하우저의 정치경제적 관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조차도 나의 정치경제적 관점이 어떤 것인지 되돌아보게 해 준다.



이 책을 예술에 관한 해설서로만 이해하는 데는 아쉬움이 있다. 아놀드 하우저 스스로는 “중요한 문제는 역사적 진실이라든가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대로라는 것보다 대상의 핵심에 닿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접근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이 작품에 대환 소회를 토로하였다. 


이 책은 예술이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이다. 사회는 예술을 어떻게 수용하고 예술가와 예술은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는지에 관한 역동적인 해석이다. 나아가서 인간의 창작활동은 어떻게 사회와 관계되어 있는지를 개괄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창작활동을 기본으로 하는 경영자와 예술가는 이 책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행위와 성과가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되돌아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분리하여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분리되었다는 것은 대상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방식이다. 우리는 분리와 일체감을 반복 함으로써만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예술에 대한 해설이나 교양서로만 읽지 않고, 예술과 경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스스로가 사회에 기생하는 인간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에 참여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두 예술과 경영이라는 주제와 질문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다만, 그 질문을 자신에게 대입하기에는 과대망상과 조급증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지고 해결해 나가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회를 더 깊이 해석하는 사람이 되고 자신의 행위를 위대함으로 연결시키려는 소박하지만 당찬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어도 좋겠다.


르네상스와 근대를 지나면서 예술은 천재와 예술품이라는 관계에 집착해왔다. 우리는 모차르트나 피카소, 미켈란젤로, 톨스토이의 작품을 잘 알고 있고 그 천재성에 대해서, 그 작품의 숭고함에 대해서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 ‘천재론’은 예술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숭고함에 다다른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일반인이 아니고 천재라는 소리를 들어도 아깝지 않은 특출 난 사람일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어떤 높은 수준의 상태에 잠시라도 도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천재’가 숭고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숭고한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이 ‘천재’이다. 아무리 뛰어난 묘사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처음으로 ‘천지창조’의 전체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천재적 작품들은 부분이 전체와 잘 조화되어있고, 전체가 제시하는 의미가 끝이 없이 이어지며, 부분도 전체를 반영하고 전체도 부분을 반영하는 조화로움을 드러낸다. 그 조화로움을 이해하기 전에 그 작품들은 우리에게 어떤 감동을 전해주어 우리를 어떤 상태에 이르게 한다. 그 감동으로부터 깨어 나와 이성으로 감동을 이해하려 할 때, 평범한 인간이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상태가 있다는 경의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예술과 천재의 관계에 대한 ‘천재론’의 이야기에는 절대적 진리와 숭고함으로 가득 찬 초월에 관한 환상을 갖도록 하는 암시가 들어있다. 인간은 이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벗어날 수 없는 세계 밖의 영원과 진리의 세계에 참여할 수도 없고, 현재는 숭고함으로 가득 찬 초월적 세계로 가는 준비의 시간일 뿐이고, 우리 스스로 그 세계를 창조하려는 시도는 신이 선택한 천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무기력의 세계를 인정해야 한다. ‘천재론’에서 예술은 인간이 하는 행위의 위대함을 상기시켜주지만, 천재가 아니라고 자각하는 사람들을 참여자가 아니라 관전자로 만든다. 이 책은 천재가 아니라고 자각하는 사람들이 실은 중요한 참여자였으며, 그 의미를 확장해 온 주된 행위자였다는 맥락을 유지한다. 


이 책은 개인과 예술의 관계가 아니라 예술로 살아남은 그 시대의 흔적을 통해서 그 예술을 선호하고 구매하고 물려주고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 사회가 어떤 역할을 했으며 예술가는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남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어떻게 노력했는지에 관한 생생한 고고학적 정치경제학적 접근이다.


이 책에는 예술이 무엇인지, 사회가 무엇인지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하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예술이 무엇인지 사회는 무엇인지는 맥락을 통해 잘 알 수 있고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술과 사회와 큰 차이가 없다. 주로 예술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미적 가치나 주요 인상을 통해 그 사회의 시대적 수요와 내재된 힘의 변화를 설명한다. 혹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구조가 어떠했는지, 어떤 가치를 선호하였는지에 따라 예술품들의 내용을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우리가 지금의 눈으로 보는 것과 달리 그 의미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에 관한 많은 설명이 있다. 예술가들에 대한 비평도 많이 있는데, 유구한 예술사의 한 가지 사건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일관된 저자의 관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가치 기준을 전문가로서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 특정한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옳다 그르다 혹은 좋다 나쁘다 하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예술 비평의 전문가는 그의 예술비평에 대하여 다소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을 이해하고 싶거나 좋아하는 일반인에게, 혹은 자신의 작업이 예술작업과 다를 게 없이 사회적 의미와 최고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생각하는 직업인에게는 아주 좋은 계몽서라고 생각한다. 그의 예술적 식견을 믿고 그의 사회와 예술에 대한 비평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예술적 관점을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작업과 행위가 어떻게 의미를 확보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 현대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예술적 방법론을 차용하고 있는 산업계의 운영방식 때문에, 예술에 대한 입장을 정해 놓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알 수 없는 폭력과 선택 강요를 당하는 판국이다. 또한 모름지기 인간은 자신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 가치생산에 참여해야 하고, 가치판단의 중심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아름다움에 대한 자기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생산과 아름다움의 극적 상징인 예술에 대한 판단 기준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적절한 예술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살아가는 중의 소소한 소비 선택에도 도움이 되고, 다른 이의 알 수 없는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며, 현대사회에서 비즈니스를 해 나가는 데에도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나도 우연히 이 책을 젊은 시절에 접한 후에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단순히 경제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어 큰 힘이 되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방대하고 치밀한 내용을 한 편의 줄거리로 요약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대한 요약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이 책을 읽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내가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 요약하여 기억하는 두 가지 문장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예술은 “재료와 디자인의 절묘한 조화”이고, 

예술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로부터 오는 불안을 드러냄으로써 각성과 기쁨을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위의 말을 아놀드 하우저가 직접 언급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그의 책을 읽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는 예술에 대한 나의 관점이다. 위의 두 문장에 대한 긴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서평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므로 소개로 그친다. 독자도 이 책을 읽고 난 후 자신의 관점을 스스로 만들어 내시기를 기대한다.





경영컨설턴트로 경영혁신, M&A, 벤처투자 등의 일을 하며 20대(1984)부터 10년을 보냈다. 인터넷 사업(1995)과 포스트인터넷사업(건축,2002)을 하면서 30대 이후 10년을 보냈고, 이후 경영전략, 인터넷, 지식, 건축, 문화에 관한 생각과 실천을 삶의 모토로 생각하면서 지낸다. 경영과 예술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클래식기타를 취미로 하고 최근 유투브에 기타곡과 자작곡을 올리기도 한다. (etime2b@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