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8.20(목) - 2026.9.30(수)
🏛️ 갤러리에스피 Gallery SP
📍 서울시 용산구 회나무로44가길 30
⏰ 화-토 10:00-18:00 / 일·월 휴관
💬 02-546-3560 / office@gallerysp.com

한 건물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을까
한 장소의 역사는 문서에 기록된 것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누군가 머물다 떠난 자리, 바뀐 공간의 쓰임, 공기와 온도, 소리처럼 기록되지 않는 감각까지 장소의 일부라고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갤러리에스피가 8월 20일부터 9월 30일까지 크리스 로(Chris Ro)의 개인전 《한때의 지금(Once Upon Now)》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갤러리가 자리한 건물에 축적된 기억과 흔적을 추적하고, 하나의 공간에 겹쳐 있는 여러 시간대를 그래픽과 회화, 오브제, 설치, 글쓰기로 불러낸다.
작업의 출발점은 갤러리에스피가 들어선 건물 자체다. 1997년 주택으로 준공된 이곳은 이후 여러 입주자를 거치며 용도와 모습을 달리해왔다. 그러나 그 시간을 온전히 복원할 만한 공식 기록은 충분하지 않다. 크리스 로는 설계 기록과 1990년대 도시개발 문서, 주거 공간에 관한 자료와 구술사 등을 조사하고, 기록 사이에 남은 빈자리를 상상으로 연결한다.
전시는 결국 한 건물의 정확한 연대기를 복원하는 작업이라기보다, 기록되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했던 시간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묻는 과정에 가깝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래픽으로 옮기는 방법
그래픽과 건축을 공부한 크리스 로는 오랫동안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공간의 성질에 관심을 가져왔다. 공기와 온도, 소리, 침묵, 분위기처럼 형태는 없지만 장소를 경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다.
이를 다루는 그의 작업에서 그래픽은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디자인의 도구에 머물지 않는다. 디지털 드로잉과 인쇄 과정에서 생기는 차이, 반복해서 찍어낸 이미지 사이의 어긋남과 흔들림까지 작업의 일부가 된다.
특히 아날로그 드로잉과 실크스크린을 겹쳐 만든 화면에서는 같은 이미지가 완벽하게 복제되기보다 조금씩 달라진다. 거칠게 찍힌 잉크의 표면과 얇은 그래픽 형상은 정지된 이미지 안에 진동과 움직임을 만든다. 사라진 장소의 기억을 하나의 확정된 이미지로 고정하는 대신, 완전히 붙잡을 수 없는 잔상처럼 남겨두는 방식이다.
이러한 그래픽은 다시 평면 밖으로 나온다. 전시장에서는 얇은 이미지와 구조물이 서로 기대고, 걸리고, 세워지고, 매달리며 기존 건축과 관계를 맺는다. 자료에 담긴 전시 전경에서도 평면의 그래픽과 투명하거나 가벼운 구조물, 선형의 설치가 갤러리의 벽과 천장, 통로를 가로지르며 공간 자체를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구성이 확인된다.
기록이 멈춘 자리에서 시작되는 '207-2'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또 하나의 작업은 크리스 로가 직접 쓴 관찰 산문 '207-2'다.
건물에 관한 기록을 조사했지만 온전한 아카이브를 확보할 수 없었던 작가는 자료만으로 채울 수 없는 시간에 글쓰기를 개입시켰다. 기획 서문에 따르면 '207-2'에서 작가는 마치 건물 자체가 된 듯 누군가를 품고 돌보고, 다시 떠나보낸 시간을 이야기한다.
때문에 이 글은 역사적 기록도 완전한 허구도 아닌 경계에 놓인다. 전시장에 펼쳐진 이미지와 구조물을 읽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면서도, 사라진 이름과 사건을 하나의 결론으로 복원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실제였고 무엇이 상상인지를 가려내는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기록이 사라진 뒤에도 장소에 남아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지에 가깝다. 회화와 그래픽, 설치 사이를 오갈 때 '207-2'의 문장을 함께 살펴볼 만한 이유다.
과거를 복원하기보다 현재와 연결하다
1976년생인 크리스 로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그래픽 디자인 석사 과정을 거쳤으며, 서울대학교에서 디자인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과 그래픽이라는 배경은 평면과 공간 사이를 오가는 현재의 작업과도 이어진다.
그의 작품은 영국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A), 파리 장식미술관, 뮌헨 디 노이에 잠룽, 국립한글박물관, 서울대학교 미술관,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등에 소장돼 있다.
《한때의 지금》이라는 제목은 과거와 현재를 일직선으로 나누지 않는다. 현재에서 과거를 되짚는 동안 과거 역시 다시 현재의 공간을 구성한다. 그래서 전시에서 살펴볼 것은 사라진 시간을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했는가보다, 서로 다른 시간의 흔적이 지금의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있다.
한때 집이었고 다른 누군가의 공간이었으며 이제는 전시장이 된 건물. 크리스 로는 그 안에서 완전한 기록 대신 흩어진 이미지와 문장, 얇은 구조물을 세운다. 《한때의 지금》은 그렇게 장소를 하나의 고정된 좌표가 아니라, 남겨진 것과 사라진 것이 계속 교차하는 시간의 층으로 바라보게 한다.
자료 및 이미지|갤러리에스피 제공
📅 2026.8.20(목) - 2026.9.30(수)
🏛️ 갤러리에스피 Gallery SP
📍 서울시 용산구 회나무로44가길 30
⏰ 화-토 10:00-18:00 / 일·월 휴관
💬 02-546-3560 / office@gallerysp.com
한 건물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을까
한 장소의 역사는 문서에 기록된 것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누군가 머물다 떠난 자리, 바뀐 공간의 쓰임, 공기와 온도, 소리처럼 기록되지 않는 감각까지 장소의 일부라고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갤러리에스피가 8월 20일부터 9월 30일까지 크리스 로(Chris Ro)의 개인전 《한때의 지금(Once Upon Now)》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갤러리가 자리한 건물에 축적된 기억과 흔적을 추적하고, 하나의 공간에 겹쳐 있는 여러 시간대를 그래픽과 회화, 오브제, 설치, 글쓰기로 불러낸다.
작업의 출발점은 갤러리에스피가 들어선 건물 자체다. 1997년 주택으로 준공된 이곳은 이후 여러 입주자를 거치며 용도와 모습을 달리해왔다. 그러나 그 시간을 온전히 복원할 만한 공식 기록은 충분하지 않다. 크리스 로는 설계 기록과 1990년대 도시개발 문서, 주거 공간에 관한 자료와 구술사 등을 조사하고, 기록 사이에 남은 빈자리를 상상으로 연결한다.
전시는 결국 한 건물의 정확한 연대기를 복원하는 작업이라기보다, 기록되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했던 시간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묻는 과정에 가깝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래픽으로 옮기는 방법
그래픽과 건축을 공부한 크리스 로는 오랫동안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공간의 성질에 관심을 가져왔다. 공기와 온도, 소리, 침묵, 분위기처럼 형태는 없지만 장소를 경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다.
이를 다루는 그의 작업에서 그래픽은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디자인의 도구에 머물지 않는다. 디지털 드로잉과 인쇄 과정에서 생기는 차이, 반복해서 찍어낸 이미지 사이의 어긋남과 흔들림까지 작업의 일부가 된다.
특히 아날로그 드로잉과 실크스크린을 겹쳐 만든 화면에서는 같은 이미지가 완벽하게 복제되기보다 조금씩 달라진다. 거칠게 찍힌 잉크의 표면과 얇은 그래픽 형상은 정지된 이미지 안에 진동과 움직임을 만든다. 사라진 장소의 기억을 하나의 확정된 이미지로 고정하는 대신, 완전히 붙잡을 수 없는 잔상처럼 남겨두는 방식이다.
이러한 그래픽은 다시 평면 밖으로 나온다. 전시장에서는 얇은 이미지와 구조물이 서로 기대고, 걸리고, 세워지고, 매달리며 기존 건축과 관계를 맺는다. 자료에 담긴 전시 전경에서도 평면의 그래픽과 투명하거나 가벼운 구조물, 선형의 설치가 갤러리의 벽과 천장, 통로를 가로지르며 공간 자체를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구성이 확인된다.
기록이 멈춘 자리에서 시작되는 '207-2'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또 하나의 작업은 크리스 로가 직접 쓴 관찰 산문 '207-2'다.
건물에 관한 기록을 조사했지만 온전한 아카이브를 확보할 수 없었던 작가는 자료만으로 채울 수 없는 시간에 글쓰기를 개입시켰다. 기획 서문에 따르면 '207-2'에서 작가는 마치 건물 자체가 된 듯 누군가를 품고 돌보고, 다시 떠나보낸 시간을 이야기한다.
때문에 이 글은 역사적 기록도 완전한 허구도 아닌 경계에 놓인다. 전시장에 펼쳐진 이미지와 구조물을 읽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면서도, 사라진 이름과 사건을 하나의 결론으로 복원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실제였고 무엇이 상상인지를 가려내는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기록이 사라진 뒤에도 장소에 남아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지에 가깝다. 회화와 그래픽, 설치 사이를 오갈 때 '207-2'의 문장을 함께 살펴볼 만한 이유다.
과거를 복원하기보다 현재와 연결하다
1976년생인 크리스 로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그래픽 디자인 석사 과정을 거쳤으며, 서울대학교에서 디자인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과 그래픽이라는 배경은 평면과 공간 사이를 오가는 현재의 작업과도 이어진다.
그의 작품은 영국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A), 파리 장식미술관, 뮌헨 디 노이에 잠룽, 국립한글박물관, 서울대학교 미술관,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등에 소장돼 있다.
《한때의 지금》이라는 제목은 과거와 현재를 일직선으로 나누지 않는다. 현재에서 과거를 되짚는 동안 과거 역시 다시 현재의 공간을 구성한다. 그래서 전시에서 살펴볼 것은 사라진 시간을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했는가보다, 서로 다른 시간의 흔적이 지금의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있다.
한때 집이었고 다른 누군가의 공간이었으며 이제는 전시장이 된 건물. 크리스 로는 그 안에서 완전한 기록 대신 흩어진 이미지와 문장, 얇은 구조물을 세운다. 《한때의 지금》은 그렇게 장소를 하나의 고정된 좌표가 아니라, 남겨진 것과 사라진 것이 계속 교차하는 시간의 층으로 바라보게 한다.
자료 및 이미지|갤러리에스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