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경영에 대한 생각들 1] 인간의 조건 (Part 1)

글 임동선 (경영 칼럼니스트)

한나 아렌트 지음 | 이진우 옮김 | 한길사 펴냄

1912 타고르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강연(삶의 구현)에서

선은 우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악은 스스로 지속하지 못함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라고 했다. 우리는 도덕과 정의가 강조되는 사회 속에 살면서 당연히 선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타고르는 우리가 선악을 판단할 없는 존재이며, 세계 스스로 선악을 드러낸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선악은 지속함과 지속할 없음에 관한 문제라는 통찰을 받아들이면, 서양철학의 가장 주제는 선악의 문제였다고 있다. 철학이 모든 지식의 가장 기초를 사유하는 것인데, 그것은 다시 말하면 세계의 지속에 관한 질문이라고 있는 것이다.

여성 철학자이면서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기심, 탐욕, 분노, 질투와 같은 인간의 악덕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처벌할 수 없어서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 없어서 처벌할 수도 없는 근본악”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인간의 조건’에서는 인간(인류) 존재 스스로 만들어 내는 근본악이 있으므로 이를 넘어서는 인간의 상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철학자들의 고민과 사유의 내용을 설명하고, 인간과 인간 공동체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하여 의미를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노동, 작업, 행위가 갖는 그 가능성과 위험을 지적한다.

한나 아렌트는 가장 기초적인 인간 조건은 ‘인간은 자연 안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만들어 낸 인공물 안에서도 살아가는 존재이며, 자신이 만든 인공물에 반응하여 다시 새로운 인공물을 만드는 존재’라고 보았다. 시스템공학의 용어를 빌리면 closed loop feedback system이다. 이 시스템은 open system과 달리 외부의 자극과 조건이 일정 범위 안에서 바뀌어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 예상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안정적인 시스템이다, 한나 아렌트는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조건’ 때문에 인간 존재를 방치하면 언제나 근본악을 만들어내는 존재라고 경고한다.

근대산업사회의 기초인 과학기술은 인간 존재의 순수한 ‘헹위’에 의하여 창발적으로 발생하여 인간에게 편의를 주고 있지만, 원자폭탄에 의한 인류멸망처럼 ‘근본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인간 조건이 closed loop feedback system이라는 것은 올바른 통찰이지만, 그 특성 때문에 근본악도 배태하지만, 다른 긍정적인 결과를 찾아가는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인문학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애칭을 가진 언어학자 마샬 맥루한은 아렌트의 인간 조건을 사물과 인간의 관계로 시각을 바꾸어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1964) 다시 말하면 기술과 사물을 인간의 도구나 편익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사물의 존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했다. 맥루한이 한나 아렌트의 ‘인간 조건의 사상’(1957)으로부터 영향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연대로 보면, 가능성은 높다고 해야겠다. 인터넷 시대의 우리는 맥루한의 사상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초기의 해커들은 맥루한의 사상에 크게 고무되어, 평등하고 열린 세상을 만드는 ‘새로운 세계의 설계자’라는 것을 의식했고, 그러한 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초기 인터넷 체계는 현재의 우리(특히 젊은이들)에게 뼛속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맥루한의 사상에 한나 아렌트가 깊은 영향을 미쳤다면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사유에 크게 빚진 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한나 아렌트가 과학기술의 ‘어두움’에 눈길을 돌린 반면, 맥루한은 과학기술과 인간 존재의 관계에 비정치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이 차이라고 하겠다.

잠시 ‘인간의 조건’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서 적절한 삶을 영위해야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사적 영역은 개인적이고 목적적이며, 감각과 인식의 개별적인 경험을 하는 영역이다. 사적 영역은 생물학적 필요 요소인 소비품을 확충하기 위해 활동하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개별적인 경험을 통해 개별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 다원성의 충전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적 영역은 자신을 순수하게 드러내고 타인의 드러냄을 마주치면서 인간과 인간 공동체의 삶을 고양시키는 영역이다, 고대의 폴리스 같은 곳이 그런 곳이었다.

또한 인간은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을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서 함께 영위해야 삶을 증진시킬 수 있다. 인간은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될 수 있는 활동을 한다, 노동은 생물학적인 존재인 인간의 지속을 위해 당연히 필요한 활동이다. 하지만 ‘노동’은 관조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어서 ‘사적 영역’의 활동이라고 보기 어렵다. 근대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인간 대부분은 자신이 하는 활동의 최종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는 노동하는 존재(직업인)가 되었다. 목적을 알지 못하는 활동은 인간을 피폐하게 하기 때문에 ‘여가활동’이라는 것이 현대인에게 추가되었는데, 여가활동은 노동력의 충전은 될지언정 삶의 증진이 되기는 어렵다. 노동과 여가활동은 사적 영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인간을 공적 영역이 아닌 현대의 ‘사회’에 부속된 존재로 만들어서 홀로 있는 시간에도 내일의 ‘사회’에 투입되기 위한 소모적 상태로 만든다, 노동하는 인간은 세계성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세계 소외’의 비인간적인 상태에 머문다.

장인의 작업처럼 도구를 만들어 스스로 목적을 추구하는 ‘작업’은 사적 영역을 조금 더 가능하게 하는 할 동이다. 그러나 근대산업사회에서 이렇게 ‘작업’을 할 수 있는 직업이나 영역은 크게 축소되었다. 디자이너, 건축가, 최고 경영자 같은 시스템의 설계자는 소수일 수밖에 없다, 또한 작업자의 생산물은 거래되기 위해 현대의 ‘시장’에 나와야 되는 데, 예전과 달리 ‘시장’은 공적 영역의 역할이 거의 없어졌다. 시장에서 근대의 ‘작업자’는 자신의 목적을 새롭게 구축할 수 있는 ‘행위’의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다. 작업자들도 노동하는 인간처럼 세계를 자신의 도구로 인식하는 수준에서 벗어 날 기회를 얻지 못한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