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프리드리히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시대를 앞서나간 작품입니다. 풍경화의 전통적 특징이었던 깊이감을 표현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눈의 초점을 맞출 만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아 황량하고 공허한 풍경 그 자체가 그려져 있습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와 하늘이 무한한 자연과 신의 존재 앞에 서 있는 수도승의 왜소하고 약한 모습을 강조합니다. 프리드리히의 이러한 도전은 풍경화를 서양 미술의 주요 장르로 격상시키는 데 기여했고, 에드바르 뭉크, 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마크 로스코,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프리디리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둘러싼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1930년대에 그의 작품이 나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데 사용된 것이었죠. 그 이유는 ‘독일인의 의식과 감성이 잘 드러난다’는 것 때문이었어요. 특히 히틀러가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무척 좋아해서, 많은 예술가들을 퇴폐 예술가로 낙인찍어 탄압할 때에도 프리드리히의 예술은 나치의 보호 아래 열렬한 조명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그의 그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의식적으로 묻히게 되었고, 독일 안팎에서 의도적으로 기피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명예는 1972년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조명하는 대형 전시회가 열리고 나서야 회복할 수 있었고, 비로소 국제적 명성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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