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30] 🧑‍🏫 위대한 예술가의 뒤에 존재하는 위대한 예술가

예술가들의 스승과 제자 이야기.

2023.07.28 Vol. 130

"멘토가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나를 챙겨 주고, 작품의 의미를 헤아려 주고, 잠재력을 감지해 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 주고, 그 잠재력을 실현해 내기 위해 기꺼이 협업해 주는 사람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죠." - 캐리 메이 윔즈

🙋🏻‍♀️ 안녕하세요, 아램이에요!
오늘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탄생한 배경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들이 뛰어난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스승들의 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스승들은 끝없는 영감과 지혜를 전달하면서, 예술가들의 독특한 기술과 노하우도 가르쳐주는 마법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자극제가 되어 스승과 정반대의 길을 선택해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구축하기도 했죠.

이번 아트레터를 통해 예술가들의 스승 중엔 어떤 인물들이 있었는지, 그들의 멋진 이야기를 즐겨보세요. 또한, 예술과 교육이 더욱 발전하는 멋진 미래를 기대해 봐요! 😊

페르낭 코르몽과 학생들
페르낭 코르몽, 하렘, 1877
페르낭 코르몽은 프랑스의 선도적인 역사 화가 중 한 명입니다. 그의 그림 스타일이 프랑스 살롱에서 호평을 받자 코르몽은 자신만의 미술 학교인 ‘코몬’을 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아틀리에 코몬은 1880년대에 시작되어 많은 재능 있는 학생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살롱의 배심원단이 점수를 높게 주는 역사 회화 기법을 그리도록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그중 몇몇은 이러한 가르침에 순응하지 않았어요. 코르몽의 화법을 따르지 않은 학생들 중에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에밀 베르나르, 빈센트 반 고흐 등이 있었습니다. 😵

외젠 부댕과 모네
Eugène Boudin, Trouville, Jetties, High Tide, 1876, 노스캐롤라이나 미술관, 롤리, NC, 미국.
외젠 부댕은 프랑스 풍경화의 선구자이자 인상주의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여겨집니다. 주로 바다와 관련된 작품을 많이 그렸고, 특히 하늘을 기가 막힌 색채로 표현해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는 그를 ‘하늘의 왕’이라고 불렀죠. ☁️

항해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기선에서 일했던 부댕은 아버지의 항해가 금지되어 더 이상 배를 탈 수 없게 되자, 아버지의 사진술 사업을 돕고 자신도 작은 가게(지금의 라이프스타일 편집샵)를 차렸습니다. 그 가게에서 여러 예술가들과 만나게 되었으며, 밀레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어요.

22살 때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고, 파리와 플랑드르 지방을 여행하며 그림도 그리고 친구들도 사귀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18세의 어린 클로드 모네였는데요! 당시 모네는 젊고 유망한 캐리커처 제작자였습니다. 부댕은 모네에게 캐리커처 대신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리도록 설득했어요. 그는 모네에게 밝은 색조, 물 조절 등을 알려주고,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 초대했습니다. 두 사람은 평생 친구로 지냈고, 모네는 부댕으로부터 풍경화에서 얻은 교훈과 영감에 항상 감사했습니다. 

백남준과 존 케이지
백남준, 로봇 연작 중 <존 케이지>  ⓒ 현대화랑
"내 삶은 1958년 8월 다름슈타트에서 시작됐다. 그(존 케이지)를 만나기 전 해인 1957년은 내게는 기원전(B.C) 1년이다." - 백남준

현대 음악가로서 이미 큰 명성을 얻은 존 케이지는 '4분 33초'라는 극적인 작품으로 논란과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 곡은 연주자가 4분 33초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예술의 정의를 완전히 뒤집는 혁신적인 시도였어요. 🎵

백남준은 이 공연을 관람하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존 케이지의 실험 정신과 관습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예술에 대한 열정에 깊이 감동했죠. 그는 존 케이지의 공연을 보면서 자신의 예술에 동양의 선불교와 공(空) 사상을 접목시키기로 결심합니다.

그 후로 백남준은 존 케이지를 자신의 평생 스승으로 여기며 존경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인 발전과 도전에 있어서 존 케이지의 영향을 항상 받았다고 얘기했고, 존 케이지의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접근 방식을 존중하며 따라갔어요.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선구적인 작품과 실험적인 정신에 많은 영감을 받아서, 1963년에 독일에서 세계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예술의 새로운 분야로 나아갔습니다.

장승업과 안중식
안중식, <백악춘효도> 1915년 여름과 가을 ⓒ 국립현대미술관
조선 3대 화가 중 한 사람인 장승업은 고아로 자랐고, 훌륭한 스승 밑에서 그림을 배워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의 스승이라 하면, 그를 유일하게 움직이고 열정을 지펴줄 ‘술’ 뿐이었죠.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국운의 쇠퇴 시기에 살기도 했고, 돈과 벼슬에 관심을 두지 않은 그야말로 예술가 그 자체였어요. 술을 좋아해서 그림을 그릴 때에 술병은 반드시 곁에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자신의 호를 '취명거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

그런 장승업이 특히 예뻐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의 마지막 도화서 화원인 안중식이었는데요. 안중식은 고종의 어진과 황태자의 어진을 그렸으며, 장승업의 전통적인 화풍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인 색채와 표현 방법을 더해갔습니다.

특히 안중식의 작품 '백악춘효(白岳春曉)'는 제목만 보면 백악산(북악산)의 봄날 풍경을 그렸어야 하는데, 특이하게도 하나는 여름을 그린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가을을 그린 작품입니다. 봄도 아닌데 그는 왜 그렇게 봄을 강조했을까요? 🌸

이 작품을 그린 1915년은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리면서 궁궐 주변이 파헤쳐지는 등 일제가 기물을 파손하는 일들이 일어났던 시기였습니다. 그림 우측, 가을 풍경 전면에 해태 1마리가 없는 것 또한 일제에 의해 소실당한 것이었죠. 당시 종로 청진동에 거주했던 안중식은 그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고, 동시에 조선의 새로운 봄날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