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59] 말해보라. 내가 왕이 될 상인가.

🤴 당신이 생각하는 왕의 이미지

예술이 배달 왔어요 💌
2021.09.03 Vol. 59

이미지의 예술: 왕실의 초상화

누군가는 '왕비를 장난처럼 그렸다'고, 또 다른 이는 '150년간 그린 군주의 그림 중 가장 정직한 초상화'라고 대립된 의견을 보인 루시언 프로이드의 엘리자베스 2세를 그린 작품
내가 그의 얼굴을 보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대상을 인식하기 전엔 무의미했던 존재가 대상을 인식한 뒤에 존재의 의미가 생기는 존재의 본질을 노래한 김춘수 시인의 <꽃>을 각색해 보았습니다.🌹 텍스트가 중요했던 시대엔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 존재의 가치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엔 누군가의 뇌리 속에 남고 중요한 존재로 저장되려면 시각적인 요소가 필요합니다. 알고 보면 비단 현대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선 이미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유능한 통치자들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림으로 그려서 남겼죠!🤴

이번 아트레터는 5명의 역사 속 인물과 그들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에 관해 짚어드리려고 해요. 역사 덕후라면 더욱 솔깃할, 세계사 속 중요 인물들의 초상이 담긴 작품들을 함께 감상해볼까요?

1. 헨리 8세

Hans Holbein the Younger, Portrait of Henry VIII, c.1537-1562,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UK.
왕정의 초상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바로 16세기 튜더족 출신인 헨리 8세가 이미지의 힘을 깨달은 최초의 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초상화를 최초로 발명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초상화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으로부터 이어져 왔고 이집트인들이 양식화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영국은 초상화에 혁명을 일으킨 곳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6번의 결혼을 하고 자신의 아내 2명을 살해한 광기 어린 군주 헨리 8세는 최초로 국왕의 초상화를 그려 유통시킨 것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었던 왕비들의 초상화도 함께 그리게 하며 유럽 전역으로 자신의 권력을 뻗쳤습니다.

헨리의 통치는 매우 격동적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국교 성공회를 설립하며 종교개혁을 초래했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결국엔 흑사병과 대형 화재로 나라가 파산하자 헨리 8세에 대한 국민들의 충성심은 점차 사그라들었습니다. 여론을 진압하기 위해 헨리 8세는 초상화를 이용했습니다. 초상화를 퍼뜨리며 국민들의 충성심을 자극했고 이는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를 그린 많은 작품들이 아직까지 전해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위 초상화는 한스 홀바인이 화이트홀 궁전의 벽화에 그린 헨리 8세의 모습입니다. 궁전의 화재로 인해 벽화 원화는 소실되었지만 궁정 화가 한스 홀바인의 철저함으로 여러 사본들이 만들어졌었고, 전해지는 사본을 모티브로 하여 다시 그려진 것입니다. 왕관을 쓰거나 권위를 나타내는 소품을 착용하지 않았어도, 발을 넓게 세운 권위적인 자세는 그의 강한 주권을 설명합니다. 벽화 속 헨리는 46살이었어요. 그는 젊고, 건강하고, 품위 있고, 군주의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언제라도 행동할 준비가 된 듯 왼손으로 단검을 움켜쥔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권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우아한 의복과 화려한 보석이 사용되었습니다.💎 뒤에 자리 잡은 반짝이는 커튼도 주목할 만합니다. 헨리 8세가 통치하는 동안, 의복은 군주의 위치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의복은 종교적 요소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튜더가에선 왕권의 상징이자 그들의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 엘리자베스 1세

Unknown Artist, The Armada Portrait, c. 1588, The Woburn Abbey Collection, Woburn, Bedfordshire, UK.
헨리 8세와 그의 2번째 부인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놀랍도록 화려한 왕실 초상화를 가졌습니다. 복잡한 혈통을 가진 남성들이 지배하는 시대의 여성 군주로서, 엘리자베스는 남성들과 경쟁하였고 그에 못지않은 용맹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노력했습니다.👸

무적함대 초상화로 알려진 이 그림은 엘리자베스의 초상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사실 이 초상화는 세 가지 버전이 있는데 지금 보여드리는 그림이 가장 원작에 충실합니다. 이 작품은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고, 여왕 뒤에 있는 그림들은 엘리자베스의 가장 위대한 승리를 기록한 두 개의 장면이 나옵니다.🛳 왼쪽에는 스페인 함대를 몰아내기 위한 영국 함대들이 보입니다. 오른쪽에는 스페인 함대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주변의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난파선의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왕비는 마치 아버지를 밟고 올라서기라도 하듯 말 휘황찬란한 보물 장식들에 둘러싸였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아름답고 강인하고 건강한 여왕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상징성을 이용했어요. 그녀는 구도 중심에 자리 잡고 보는 이의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킵니다. 도자기 같은 피부, 강한 턱, 그리고 한 곳을 응시하는 시선은 그녀의 강인한 의식과 두려움 없는 모습을 반영합니다. 목에 있는 디테일한 레이스는 태양 혹은 후광처럼 펼쳐졌습니다. 거기에 너무 남성스러운 면만을 강조하지 않고 부드러운 여성미가 포인트로 자리 잡았는데, 그것은 바로 드레스를 장식하는 분홍색 리본입니다.🎀

이 초상화에 쓰인 색상 중 검은색은 항상성(영원성)을, 흰색은 정조를 상징합니다. 또 그녀의 순수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진주를 활용했습니다. 800개 이상의 진주가 그녀의 목, 머리카락 그리고 드레스를 장식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비혼주의자였는데 그녀의 부모님이 정치적으로 갈등하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음모 하에 죽는 것을 목격 보며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의 외모는 여성스러웠던 어머니를 닮기보단 아버지 헨리를 많이 닮아 다소 보이쉬했습니다. 매부리코에 170cm가 되는 큰 키였던 그녀는 그래도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만은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그 긴 손가락으로 매만지고 있는 지구본은 미국 대륙을 가리키고 있고, 이는 제국의 확장을 위한 영국의 탐험을 암시합니다.🌎

3. 루이 14세

Hyacinthe Rigaud, Louis XIV, 1701, Musée du Louvre, Paris, France.
전 세계에 무역이 발전하게 된 것처럼, 예술과 정치를 포함한 모든 아이디어들이 상업 및 여행을 통해 널리 퍼졌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도 시각적, 언어적 선전(프로파간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싸고 빛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사랑하는 유미주의자이자, 베르사유의 창시자인 악명 높은 루이 14세가 화려한 초상화를 하나 갖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17세기 중반까지 프랑스는 유럽의 가장 크고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루이 14세는 누구도 제압할 수 없는 절대 군주로 군림했습니다. 그는 힘을 더욱 부풀리기 위해, 스스로 태양의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죠. 이 이름은 자신이 그리스 신 아폴로의 신성한 혈통임을 암시하며 동시에 우주의 중심이라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초상화의 모든 디테일이 군주로서 그가 가진 패권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훤히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림 속 주인공은 또다시 중앙에 위치했습니다. 루이 14세는 권위 있는 포즈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그에게 집중시킵니다. 각을 세운 자세는 왕의 곧은 성격과 자신감을 드러냅니다. 반짝이는 고급스러운 옷감은 그의 왕위에 걸맞은 풍족함을 드러냅니다. 흰 가죽과 함께 금빛 백합 문양(Fleur-de-lys, 플뢰르 드 리스)으로 장식된 푸른 망토는 프랑스 왕실을 상징합니다.⚜️ 루이가 엉덩이에 차고 있는 것은 보석으로 장식된 왕검으로, 그의 군사적 기량을 돋보이게 합니다. 그가 왕이라는 걸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오른손 아래엔 왕관이 놓여 있습니다. 

화려하게 서 있는 그의 뒤에는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대리석 기둥과 함께 고전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 초상화가 만들어졌을 때, 루이 14세 왕은 63세였습니다.👴🏻 당연히 그의 머리는 그림보다 숱이 적고, 다리는 앙상했으며, 키는 더 작았습니다. 루이는 초상화를 통해 이상적인 자기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그가 젊은 모습이 아니란 걸 표현한 유일한 곳은 처진 볼살과 이중 턱뿐입니다.

4. 마리 앙투아네트

Jean- Baptiste- Andre-Gautier Dagoty, Marie Antoinette, 1775, Palace of Versailles, France.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라는 말로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입니다. 고증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요. 당시 프랑스혁명에 앞장선 혁명세력들의 조장된 낭설이라고 합니다.

흉년으로 인한 기근과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폭동이 일어난 프랑스. 당시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데에는 루이 16세와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풍요로워 보이는 생활이 한몫 했습니다. 초상화만 보아도 아주 으리으리하죠. 상대적으로 궁핍했던 시민들의 시선에서 봤을 때 왕실의 생활이 굉장히 사치스러워 보였을 것입니다.

고티에 다고티가 그린 초상화는 여왕이 직접 의뢰한 것입니다. 풀코트 드레스를 입은 새 여왕의 첫 공식 초상화를 제작하는 임무는 상당히 중요했어요. 이 시기에 프랑스 여왕들은 최신 패션 트렌드를 선도했습니다. 앙투아네트도 패션, 예술 분야의 셀럽이었죠. 그녀의 드레스는 마치 파란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녀가 두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녀의 몸과 가발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그것은 진주처럼 보입니다. 탁자 위의 백합은 그녀의 순수함을 상징합니다. 백합 옆엔 절반이 넘게 가려진 왕관이 있으며, 이는 그녀가 프랑스의 군주임을 드러냅니다.

젊은 듯 성숙해 보이는 앙투아네트는 역시나 초상화의 중심에 위치했습니다. 배경에는 왕권의 전형적인 상징인 대리석 기둥과 군주의 힘을 암시하는 패브릭이 곳곳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루이 14세가 입었던 의복과 비슷한 모습이 연출되었네요. 그녀는 프랑스 왕실을 상징하는 푸른색 백합 문양 장식에 휘감겨 있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오른손으로 만지고 있는 지구본은 지구 꼭대기에 손을 위치함으로써 새로운 나라를 발견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싶은 욕구를 암시합니다.

5. 빅토리아 여왕

Thomas Sully, Queen Victoria, 1838, The Wallace Collection, London, England.
6세기에 엘리자베스 1세가 있었다면, 19세기 영국엔 빅토리아 여왕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와 비슷한 길을 걸은 이 젊은 여왕은 남성들과 경쟁하며 권력을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결혼에 있어서도, 엘리자베스 여왕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커리어가 낮아지고 권위에 위협을 받을까 봐 회의적이었습니다. 아이를 갖는 것 또한 그녀의 능력에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했었죠. 하지만 여러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외사촌인 앨버트 공작에게 반해 결혼을 하고 9명의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미국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초상화 화가 토마스 설리는 런던에서 요청을 받아 당시 왕실의 인물화를 그립니다. 설리는 왕비를 포함해 영주, 공작들을 만나며 만찬을 나누고, 실제 그들의 생활을 밀착하여 관찰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보는 이로부터 가장 칭송받는 빅토리아 여왕의 이미지가 된 초상화를 제작했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빅토리아 여왕의 젊고 순진한 모습, 또 엄숙하지만 무겁지 않은 모습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설리가 해냈어요. 지금까지 여왕을 그렸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초상화로, 여왕은 어깨너머로 관객을 향해 시선을 보내다가 살짝 당황한 것처럼 보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에 남성성이 강조되었다면, 이 각도는 권위적이면서도 여성성이 돋보입니다. 살짝 비틀린 몸의 각도로 인해 그녀의 섬세한 얼굴뿐만 아니라 긴 목과 깊게 파인 등 라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진지함과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포즈네요.😲

이 초상화는 과거에 주로 그려졌던 화려하고 거대한 상징물들을 덜어내고 훨씬 단순한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몸에 딱 떨어지는 드레스를 입고, 반짝이는 왕관을 썼어요. 그녀의 권위를 상징하는 아치형 왕관이 어둠 속에서 반짝입니다.👑 환한 빅토리아 여왕의 자태와 대조되는 어두운 배경은 여왕이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드라마틱한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완벽하게 포착한 작품입니다.

👨🏻
"진정한 초상화는 오늘로부터 백년 후, 이 사람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증언해 줄 것입니다."
- 사진가, 필리프 홀스먼

🙋‍♀️

이제 우리는 왕실의 초상화들이 얼마나 세심하게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왕실 초상화가 단순히 그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왕실의 초상화는 제각각 군주의 힘, 젊음, 아름다움,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알리는 증거였습니다. 이 초상화들 중 어떤 것들은 판화로 복제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또 어떤 것들은 동전에 새겨 백성들이 그들의 왕을 가까이에서 느끼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이미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누군가가 잊을 수 없는 인물이 되도록 하는 데 영향을 끼치고 있지요.

지금 당장 권력자의 모습을 떠올려보세요. 머릿속에 그려진 그 모습이 진짜 그 사람의 것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의 모습을 담은 누군가의 것일까요?😏


지난 호 아트레터를 못 보셨다면?

[vol.58] 죽은 자연을 그려 봐. 그게 정물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