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후, 고갱은 테하마나를 버리고 단 4프랑을 손에 쥔 채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곧 그의 타히티 그림들은 팔리기 시작했고 고갱은 ‘이때다!’ 싶어서 이국적인 폴리네시아 의상을 입고 파리의 보헤미안 몽파르나스 지역에 주간 '살롱'을 운영하며 자리를 잡았습니다. 🍷 그리고 다시 10대 인도계 말레이시아인 소녀와 바람을 피웁니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아내 메테와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게 되었고, 고갱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파리 예술계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그는 타히티로 돌아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한 친구가 1895년 6월에 도움을 줘 마지막으로 타히티로 떠납니다. 🎟
이후에 고갱은 이전보다 더 놀라운 작품들을 만들었지만, 결코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1903년 5월 8일, 고갱은 54세의 나이로 병이 들고 빈털털이가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분명한 것은 고갱은 진심으로 타히티의 문화와 예술을 탐험하려는 강력한 욕망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똑같이, 그는 사회적 관습과 제도, 도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움직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 |
특히 1890년대 이후 타히티 섬에서 그린 꿈같은 작품들은 그를 미술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유명한 예술가로 만들었죠. 1890년대 고갱이 타히티를 방문했을 때, 그는 천국을 찾는 천재였을까요? 아니면 쾌락을 찾는 허랑방탕한 방랑자였을까요? 🤔
이번 아트레터에선 고갱의 삶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며 독자님들 스스로 ‘예술가의 삶은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생각해 보았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