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77] 💰 예술과 후원: 그 불편한 동거와 위대한 걸작들

예술과 후원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다

2024.08.30 Vol. 177

파블로 피카소와 호안 미로. 이들은 동지이자 친구면서 서로의 정서적 후원자였다.
안녕하세요, 아램이에요! 🙋🏻‍♀️
9월이 되면 대한민국은 가을 미술 축제로 물들어갑니다. 🍂 다양한 전시와 행사가 곳곳에서 펼쳐지고, 대중들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되죠.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 데는 정부와 기관, 그리고 미술계 각층의 힘이 큰 역할을 합니다. 사실, 이런 노력들도 일종의 예술 후원이라고 볼 수 있어요.

예술가들이 자신의 창작물을 세상에 내보이고,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중요한 후원입니다. 최근에는 이런 후원이 더욱 다양해지고 있어요.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나 기업들이 예술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움직임도 눈에 띄고 있죠.

이번 아트레터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예술가와 후원자가 만들어낸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해드릴게요. 어떤 작품들이 그들의 손을 거쳐 나왔고,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은 무엇인지 함께 알아봐요!

미켈란젤로와 교황 율리오 2세
Michelangelo, The Prophet Zechariah, 1512, Sistine Chapel, Vatican City, Vatican. Wikimedia Commons
미켈란젤로와 교황 율리오 2세의 관계는 예술가와 후원자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예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지였지만, 때로는 적처럼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독특한 관계는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들을 탄생시켰죠.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작업을 맡았을 때, 율리오 2세는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하지만 이 후원이 단순히 예술을 사랑해서만은 아니었어요. 율리오 2세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교회의 이미지를 드높이기 위해 예술을 이용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러한 의도를 알면서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교황을 비판하는 숨겨진 메시지를 넣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시스티나 성당의 한 구석에는 예언자 제카리아의 얼굴을 교황의 얼굴로 그려넣고, 그 뒤에서 천사들이 비꼬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인물들을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천사의 손가락 모양을 보면, 엄지 손가락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어있는 손가락 욕설(f*** you)이에요. 🤬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의 요구에 따라 작품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예술적 자유와 비판의식을 놓지 않았던 것이죠. 그들의 관계는 예술과 권력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보여주는 한편,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걸작들을 탄생시킨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시스템에 맞선 예술가들의 반란
Édouard Manet, Luncheon on the Grass, 1863, Musee d’Orsay, Paris, France.
르네상스 시대에는 귀족 가문이나 종교 단체가 주로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며,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같은 거장들이 탄생할 수 있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예술가와 후원자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여전히 부유한 후원자들이 예술가들을 지원했지만, 그 대상은 주로 전통적인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은 예술가들이었어요. 아카데미는 종교적이거나 역사적인, 그리고 초상화 같은 전통적인 주제를 선호했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도전의 장벽이 되곤 했죠.

예를 들어, 파리에서 활동하던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같은 예술가들은 기존의 엄격한 아카데미 전통에 반기를 들었어요. 그들은 아카데미에서 계속해서 작품이 거절당하자, <살롱 드 레퓌제(Salon des Refusés)-낙선전, 패자부활전>이라는 자체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여기에서 선보인 작품들이 이후 인상주의라는 세계적인 예술 운동의 씨앗이 되었죠. 🥑

이처럼 시간이 지나며 예술가들은 전통적인 후원 시스템을 벗어나,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변화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다양한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어요. 19세기 후반은 예술과 후원의 관계도 조금씩 다채로워지기 시작한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디에고 리베라와 록펠러
Diego Rivera, Man Controller Of The Universe, 1934, Palacio de Bellas Artes, Mexico. Wikimedia Commons.
1932년, 미국의 석유 재벌 존 D. 록펠러 Jr.는 뉴욕 록펠러 센터에 벽화를 그릴 예술가로 디에고 리베라를 선택했습니다. 리베라는 당시 사회주의 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었지만, 록펠러의 부인이 그의 열렬한 팬이었고, 록펠러도 디에고의 재능을 높이 사서 이 프로젝트를 의뢰했죠. 원래는 앙리 마티스나 파블로 피카소에게도 제안했지만, 마티스는 다른 프로젝트로 바빴고, 피카소는 아예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고 해요. 😓

처음에 둘은 스케치를 그리는 조건과 벽화의 주제에 대해 합의했는데, 주제는 '새롭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리베라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계획을 바꾸었고, 벽화에 당시의 정치적 이념을 가득 담기 시작했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것은 레닌의 초상을 포함시킨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상징인 록펠러 센터에 사회주의 지도자인 레닌을 그려넣는, 말 그대로 록펠러 가문을 향한 도발이었어요. 🤬

그러나 리베라의 도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벽화 속에 존 D. 록펠러를 풍자적으로 그려넣었는데, 그가 술을 마시며 한 여성과 함께 있는 장면을 추가한 거죠. 재미있는 점은, 록펠러가 실제로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에요. 더 놀라운 것은, 리베라가 록펠러의 머리 위에 매독 박테리아를 그려넣은 겁니다. 이 그림은 록펠러 가문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이자, 예술을 통해 그를 공격하려는 의도로 해석됐어요.

이 사건으로 록펠러는 리베라에게 벽화를 수정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리베라는 ‘대신 링컨을 추가로 그려넣겠다’라며 이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리베라는 차라리 벽화가 파괴되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했고, 결국 계약금을 모두 받은 뒤 벽화는 철거되고 말았어요. 그 후, 리베라는 멕시코로 돌아가 비슷한 벽화 <인간, 우주의 통제자>를 다시 그렸고, 이 작품은 지금도 멕시코시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레이슨 페리와 앤서니 도페이
Grayson Perry, Portrait of Anthony d'Offay, 42 x13,4 cmx44 x15 cm, glazed earthenware. This artwork is part of the solo exhibition by Grayson Perry. On view in the Bonnefantenmuseum.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는 독특하고 대담한 예술로 잘 알려진 영국의 도예가입니다. 2003년 터너상을 수상하며 더욱 주목받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여장을 하고 시상식에 등장해 큰 화제를 모았죠.(그레이슨 페리는 ‘성도착증 환자’, 정확히 말하면 ‘복장도착자/transvestite 입니다.) 페리는 전통적인 도자기 위에 사회적, 문화적 문제를 다루는 엽기적이면서도 풍자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해요. 🏺

페리가 한 번은 자신의 큰 후원자였던 갤러리스트 안소니 도페이(Anthony d'Offay)와의 불화를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앤서니 도페이는 영국 미술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갤러리스트로, 페리는 그의 이름을 딴 도자기 작품을 만들었어요. 그가 만든 작품은 커다란 검은 도자기로, 제목은 <안소니 도페이의 초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자기의 모양이 무엇이었냐고요? 바로 두 개의 거대한 검은색 남성 성기였죠! 페리는 이 작품을 통해 도페이의 권력과 영향력을 풍자하며, 예술가로서의 자유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

당연히, 도페이는 이 작품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겠죠. 결국 이 사건은 그들과의 관계에 긴장을 불러일으켰고, 페리와 도페이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페리는 후에 이 경험을 통해 예술가로서 후원자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레이슨 페리의 에피소드는 예술가와 후원자 사이의 관계가 항상 순탄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갈등과 오해가 생기기도 하지만, 이런 경험들이 예술가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기도 하죠. 결국, 예술가와 후원자가 함께할 때, 예술은 더욱 풍부해지고 다양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찰스 사치: 신진 예술가들의 발판을 마련하다
다양한 포즈의 밀랍인형 작품을 창작하는 '개빈 터크'를 소개하는 사치 갤러리
찰스 사치(Charles Saatchi)는 현대 미술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후원가에요. 그는 이라크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뒤, 광고계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 미술 수집가로 변신했죠. 1985년 사치 갤러리를 설립해 혁신적인 현대 미술 작품들을 선보이며,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치는 1990년대에 YBA(Young British Artists)라고 불리는 영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면서 더욱 유명해졌어요. 데미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그리고 사라 루카스 같은 작가들이 그의 지원 덕분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죠. 사치는 그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전시하며, 이들이 미술계에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

하지만 찰스 사치의 후원이 항상 순조롭지만은 않았어요. 그의 수집과 전시는 종종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도발적인 취향은 사람들 사이에서 찬반양론을 일으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치는 현대 미술에 대한 열정과 신진 예술가들을 발굴하는 능력으로 미술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죠. 결국 그의 독특한 취향은 경력에 큰 발판을 마련해주었습니다.

2010년, 사치는 그가 설립한 사치 갤러리와 수백 점의 예술 작품을 영국 정부에 기증하면서 미술계에서의 그의 유산을 더욱 확고히 했어요. 이로써 런던의 사치 현대 미술관이 탄생했고, 지금도 많은 신진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찰스 사치의 이야기는 현대 미술에서 후원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줘요. 때로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의 후원이 없었다면 오늘날 많은 예술가들이 경제적 안정과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 ARTLAMP
작지만 의미 있는 행동
오늘 소개한 거물급 후원자들처럼 거창하진 않지만, 저희 아트램프(ARTLAMP)도 오랜 시간 작지만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 2020년부터 매주 아트레터를 통해 예술을 사랑하는 분들께 다가가고, 조금씩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어요. 💫

국내외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꼭 보았으면 하는 전시들을 알려드리며, 예술이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 작은 다리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술적 영감이 담긴 라이프스타일 콘텐츠를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예술이 주는 가치를 전하려고 해요. 

전시 기획이 주어질 땐, 다양한 예술가들을 등용하고 이들의 활동을 홍보하며, 창작자들의 목소리를 널리 알리는 것도 예술 후원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구독자 분들과 함께 예술을 즐기고, 그 가치를 나눌 수 있길 바랍니다. ☺️


다양한 문화 예술 혜택과 이벤트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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