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82] 🚙 요리의 예술은 에드워드 리, 기술의 예술은 부가티

팔수록 적자 보는 자동차? 하지만 부가티는 예술을 팝니다!

2024.10.11 Vol.182

부가티(Bugatti) 타입 35
안녕하세요, 아램이에요! 🙋🏻‍♀️
👨‍🍳 요즘 '에드워드 리' 셰프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리시죠? 실력과 창의성,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요리를 만들어 내고, 자신만의 스토리와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균은 나의 베스트야🩷) "실력 1위 나폴리 맛피아, 예술성 1위 에드워드 리, 리더십 1위 최현석, 예약 1위 이모카세 1호"라는 밈까지 돌고 있어요. 😆

이처럼 자신의 전문 분야에 예술을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들을 보면 늘 흥미롭습니다. 오늘 소개할 '부가티 형제’도 마찬가지예요.

부가티자동차 산업에서 기술의 예술을 추구하며,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놀라운 성능과 아름다움으로 하이퍼카 시장을 개척한 선구자입니다. 단순히 빠른 차를 만드는 걸 넘어서, 자동차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여기게 했죠. 정교한 기술, 아름다운 디자인, 그리고 끝없는 완벽함을 향한 집착까지. 부가티는 자동차 마니아들의 로망이자,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완성된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 압도적인 완성도는 마치 말도 안 되는 가격마저 정당화하는 듯한 경지에 이르렀죠. (국내 정식 등록된 부가티 차량, 현재 4대;)

오늘 아트레터에서는 부가티 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기술의 예술'을 이뤄냈는지, 그리고 그 완벽함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하나하나 살펴볼게요.

부가티 가문의 창의성
에토레 부가티, Type 2, 1900-1901. Wikimedia Commons.
부가티의 창립자 에토레 부가티의 창의력은 사실 대대로 이어진 이탈리아 예술 DNA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조반니 루이지 부가티는 건축가이자 조각가였고, 아버지인 카를로 부가티는 가구와 보석 디자인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친척들 또한 예술가가 많았어요. 예를 들면, 에토레의 이모부는 인상주의 화가로 유명한 조반니 세간티니였죠. 👨‍🎨

이렇게 예술과 건축, 디자인의 피가 대대로 흐른 덕분에, 에토레는 단순히 차를 만드는 기술자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디자인할 때도 단순히 기능성을 넘어서, 차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창의적인 프로세스로 설계했죠. 그의 남동생 렘브란트 부가티 역시 동물 조각으로 유명한 예술가로, 가족 모두가 창의적인 소울을 품었습니다.

(형) 에토레 부가티: 혁신을 이끈 완벽주의자
부가티 Type 41 르와이얄
에토레 부가티는 혁신과 완벽함을 추구한 천재 엔지니어이자 예술가였어요. 처음에는 미술 아카데미에 다녔지만, 기계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고 공장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죠. 그곳에서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개조하며 기술적인 재능을 발휘했고, 17살에 자신의 첫 번째 자동차 프로토타입인 ‘타입 1’을 직접 드로잉하고 설계해 만들었습니다. 🛞

이후 그는 점점 더 기술적으로 완성도 높은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에토레는 늘 자동차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여야 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그의 차들은 항상 뛰어난 성능과 아름다운 디자인을 결합한 걸작들이었죠.

예를 들어, Type 35는 경주용 차로 엄청난 성능을 자랑했지만, 동시에 우아한 디자인 때문에 부유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차는 1920년대에만 1,000번 이상 우승한 기록을 세우며, 부가티를 최고급 자동차 브랜드로 자리잡게 했죠. 또한 럭셔리 자동차인 'Type 41 르와이얄'은 왕족과 부호들을 위한 최고급 차량으로, 그 희소성과 아름다움이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에토레는 완벽주의 성향으로도 유명했어요. 그는 "지나치게 아름답다거나 너무 비싸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길 정도로, 디자인과 성능 모두에서 타협하지 않았죠. 실제로 부가티의 차는 부품 하나하나를 손으로 깎아 만들었고, 엔진은 기름 한 방울 새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조립했습니다. 심지어 엔진 룸 내부에도 아름다운 패턴을 새겨 넣었어요.

정열적인 빨갠색과 60개의 진주를 상징하는 도트가 어우러진 부가티의 타원형 로고 또한 에토레가 직접 디자인했습니다. 그릴에 부착할 엠블럼의 위치까지 꼼꼼하게 지시했죠. 그의 디자인이 의미하는 것은? 뭐, 없습니다. ‘가장 아름답게!’

(동생) 렘브란트 부가티: 동물 조각의 거장
렘브란트 부가티, Plaster model of Walking panther, 1904, 오르세 미술관.
부가티 형제 중 동생 렘브란트 부가티는 동물 조각의 거장이었어요. 그의 아버지는 예술가로 가득한 집안 내력이 싫었는지, 예술가를 꿈꾸는 렘브란트에게 엔지니어가 되라고 했죠. 하지만, 어느 날 렘브란트가 만든 목동과 세 마리 소 조각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고 해요. 불과 14살짜리의 작품이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였죠. 🐂

렘브란트는 동물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을 넘어서 그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습니다. 벨기에 앤트워프 동물원에 초대받아, 그곳에서 살며 동물들과 교감했는데, 사자, 코끼리 같은 다양한 동물을 직접 돌볼 기회도 있었죠. 그의 조각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동물들의 습성, 행동, 움직임을 정확히 이해했는지 보여줍니다. 그는 동물을 인간처럼 묘사하지 않고, 그들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려고 했어요. 그래서 반려 동물을 키우지 않았고, 영양 2마리만 2주간 마당에서 돌보았다고 해요. 이러한 점이 렘브란트 부가티의 작품을 특별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는 다른 조각가들이 작업실에서 주로 작품을 완성하는 것과 달리, 실제 동물을 바로 앞에서 관찰하며 작업했어요. 더 몰입해서 작업할 수 있도록 플라스틸리나(색점토)라는 유연한 점토를 사용했는데, 이 덕분에 동물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렘브란트 부가티, Wikimedia Commons.
그는 27세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고, 예술적 성취가 최고조에 달했어요. 하지만 이 화려한 경력 뒤에는 깊은 외로움과 정신적 고통이 수반되었습니다.

그의 정신적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졌어요. 렘브란트는 우울증과 함께 당시 의학으로는 치명적이었던 결핵에 걸렸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앤트워프 동물원이 문을 닫게 되었고, 그가 사랑했던 동물들은 전쟁 속에서 사료가 부족해져 도살 당하고 말았어요. 그 중에는 렘브란트가 직접 돌보고 애정을 쏟았던 동물들도 포함되어 있었죠. 🦏🐆

이 사건은 렘브란트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동물들과의 교감을 통해 위안을 얻었는데, 그 동물들이 차례로 죽어가자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힘을 잃어버렸던 거죠. 전쟁으로 인해 세상도, 사랑했던 동물들도 그를 떠나버린 상황에서, 렘브란트는 점점 더 고립되고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어요.

결국 그는 1916년,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과 고립, 질병, 그리고 깊은 우울감이 그를 파멸로 이끈 것이었죠.

형제의 만남 - 부가티 로얄의 상징, 코끼리 엠블럼
렘브란트 부가티가 제작한 춤추는 코끼리 모양의 조각(Dancing Elephant)
부가티의 클래식 모델 중 하나인 '부가티 르와이얄'에는 아주 특별한 장식이 있어요. 바로 동생 렘브란트 부가티가 만든 춤추는 코끼리 엠블럼입니다. 🐘

렘브란트는 파리의 동물원에서 만난 아프리카 코끼리 '레이첼'을 모델로 이 조각을 만들었어요. 이 코끼리는 렘브란트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가 만든 다른 작품에서도 비슷한 자세로 등장합니다. 부가티 르와이얄의 후드 위에 자리한 이 코끼리 조각은 당시 롤스로이스의 '환희의 여신상'과 같은 수준, 어쩌면 그 이상의 상징성을 지녔죠.

이 코끼리 엠블럼은 부가티 가문의 예술적 유산과 창의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에요. 에토레가 자동차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면, 렘브란트는 그 자동차에 영혼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 셈이니까요. 이 엠블럼은 스포츠카나 레이싱 모델에는 사용되지 않고, 오로지 부가티의 럭셔리 세단에만 장착되었습니다. 그만큼 부가티의 클래식 모델에서만 볼 수 있는 희소한 상징이기도 해요.

부가티 형제의 유산 - 비극과 혁신
부가티 시론
에토레 부가티는 자동차를 예술로 승화시킨 천재 엔지니어였고, 동생 렘브란트 부가티는 동물 조각으로 깊은 감동을 남긴 예술가였습니다. 이 두 형제는 각각의 분야에서 혁신과 예술을 추구하며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1939년, 에토레의 후계자였던 아들 장 부가티가 경주용 자동차 '타입 57'을 테스트하다가 사고로 사망하면서 부가티 가문에 큰 충격을 안겼죠. 😱 이 사건은 에토레와 그의 회사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로 인해 회사는 점점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은 부가티의 몰락을 가속화했고, 1947년 에토레마저 사망하면서 부가티는 한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죠.

하지만 이탈리아 사업가 로마노 아르티올리가 1987년에 부가티 브랜드를 인수하며 재건을 시도했고, 그 뒤를 이어 1998년에는 폭스바겐이 부가티를 인수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

사실, 부가티는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는 차예요. 차량 1대의 생산 비용이 약 80억 원에 달하는데, 실제로는 그 절반인 30~40억 원에 판매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스바겐이 부가티를 인수한 이유는 바로 그 브랜드 가치에 있어요. 예술적 장인 정신, 럭셔리함, 그리고 고급스러움을 상징하는 부가티는 폭스바겐에게 부족했던 이미지를 완벽하게 보완해줄 수 있었죠. ✨

이처럼 부가티는 단순히 자동차를 파는 게 아니라, 예술적 가치를 팔고 있어요. 사람들이 부가티를 동경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 차가 단지 빠르고 비싼 차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혁신과 예술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에요. 비록 경제적 측면에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지만, 그 이상의 브랜드 가치와 예술적 감동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부가티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희소성 있는 브랜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