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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58] 죽은 자연을 그려봐. 그게 정물화야.

2021-08-26
⏳ 정물화의 역사

예술이 배달 왔어요 💌
2021.08.26 Vol. 58

당신 곁의 정물화(Still Life)

비비드한 색감을 이용해 고풍스러운 사실적 묘사를 한 루이지 루치오니의 작품 <Arrangement in Blue and White> (1940, DC Moore Gallery, New York, NY, USA)
학교에서 주변에 있던 소품 하나를 단상 위에 올려놓고 다 같이 따라 그렸던 미술 시간을 기억하세요? 정물화는 우리가 가장 쉽게 접근하고, 또 널리 알려진 미술 장르 중 하나입니다. 정물화(靜物畵, Still Life)는 말 그대로 정지되어 있는 물건, 즉 생명이 없는 사물을 그린 그림인데요.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는 과일, 꽃, 식물, 또는 악기, 책, 보석과 같은 사물들이 있습니다.🪘

🧐 그런데 말입니다… 정물화가 눈에 보이는 사물의 형태와 요소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외에도 부와 권력의 상징, 그리고 시간의 유한성을 내포하는 철학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이번 아트레터에서는 미술 장르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물화가 미술사에 언제 등장했는지, 또 어떤 흐름의 물결을 타고 현재까지 이어지는지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원: 고대시대

폼페이에서 발견된 프레스코화 <glass bowl of fruit and vases> (70 CE,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Naples, Italy)
고대 로마의 폼페이 벽화에서 정물화의 시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부유한 전원도시였던 폼페이는 화산 폭발로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적 유산입니다.🛕 인간의 세속적인 삶을 중시했던 이 고대 도시의 집과 상점들에는 정물화나 동물화, 풍경화 등 다양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어요. 특히 요즘 같으면 빵집이나 마트 같은 곳의 벽면에 마치 광고를 하듯이 음식을 표현한 그림들이 프레스코나 모자이크 형태로 발견됐습니다. 지금 보는 작품에선 과일이 가득 담긴 유리 바구니와 화병, 또 신에게 제물로 바칠 것 같은 음식이 보이네요.🍇


2. 유행: 17세기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Still life with pots> (1650, Museu Nacional d’Art de Catalunya, Barcelona, Spain)
중세에도 정물화가 있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꽃을 포함한 정적인 사물들은 배경으로만 이용됐습니다. 그렇다면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사람이었죠.🤴🏻 그러다가 르네상스를 맞아 예술이 급부상한 이후 부르주아, 상업 활동을 통해 신흥 부자가 된 예술 애호가들이 많아지며 미술품 수요가 많아졌습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리기 어려운 인물화나 종교화 대신, 사람들이 일상에서 쉽게 보고 그릴 수 있는 정물화가 늘어나게 되었죠.

특히 그 수요 확장은 17세기 네덜란드스페인에서 크게 일어났습니다. 스페인으로부터 막 독립한 네덜란드의 상류층 개신교인들은 이 그림을 식당과 거실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있는 흔한 사물을 그린 그림이 아니었어요. 이 당시엔 국제 무역이 왕성하게 시작할 때라 해외에서 들여온 이국적인 과일과 동물들이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은 구하기 어려운 물체들을 집에 가져와서 화가에게 그리게 하고, 집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자신의 경제력을 자랑했습니다. 정물화가 풍요로움을 증명하는 확실한 도구였던 셈이죠.

스페인에서도 상황은 비슷했고, 역시나 정물화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스페인에서 가장 위대한 정물화가로 꼽히는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은 단순한 구성, 일상에 있는 사물의 초현실성, 바로크 특유의 빛과 그림자를 돋보이게 표현하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지금 보아도 군더더기 한 점 없이 매끈하고 단아하게 떨어지는 곡선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요.

3. 철학: 메멘토 모리

안토니오 데 페레다 <The Knight’s dream> (1650, Real Academia de Bellas de San Fernando, Madrid, Spain)
지금까지 본 정물화가 풍요롭고 화려하다고 해서 그 시대 사람들이 좋은 순간만을 기억하려고 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정물화는 점차 바니타스를 담게 됩니다. '바니타스'란 유한하고 세속적인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허무함을 뜻합니다. 비슷한 말로 메멘토 모리(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마라. 즉 죽음을 기억해라)라는 라틴어도 있지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죽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림 속 곧 시들어버릴 꽃들은 우리에게 시간의 한시성과 인생의 짧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정물화엔 꽃이나 과일 외에도 돈, 악기, 보석 등의 주제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물건들은 우리가 세상에 남겨두고 떠날 쓸데없는 쾌락, 허영을 상징하죠.

스페인의 화가 안토니오 데 페레다의 작품 <기사의 꿈> 속 사물들은 여러 의미들을 상징합니다. 보석과 동전은 우리가 가져갈 수 없는 '지상의 소유물'을 나타내며 시계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냅니다. 가면은 이 세상을 마치 ‘막이 내리면 끝나는 연극’에 비유한 것입니다. 꽃은 '찰나의 순간'을, 해골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해골 옆엔 꺼진 촛불이 놓여 있는데, 이것이 바로 ‘메멘토 모리’를 은유합니다. ‘자신이 언젠가 죽는 존재임을 잊지 말라’며 각성시키죠. 메멘토 모리는 ‘허무한듸! 언젠가 죽는데 대충 살자!’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매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죽음은 언제든 가까이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더 열심히, 치열하게, 후회 없이 살 것을 이야기합니다.

4. 파리로 넘어 간 정물화

폴 세잔 <Straw-Trimmed Vase, Sugar Bowl and Apples> (1890-1893, Musée de l’Orangerie, Paris, France)
정물화 장르의 한 획을 그은 프랑스 화가가 있습니다. 바로 폴 세잔이에요. 그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세잔은 유독 정물화 주제로 사과를 좋아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과의 색과 형태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새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남들과 같은 것을 지독히 싫어했던 세잔다운 이유죠? 세잔의 사과는 아담, 뉴턴, 스티브 잡스의 그것처럼 미술계에 새로움을 알리는 아이콘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세잔은 19세기 말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회화의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세잔의 작품을 보면 여러 각도에서 물체들을 관찰하고 그것을 한 화면에 담는 아주 신기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사과는 형태를 단순화시켜 둥근(구) 모양으로 그렸습니다.🔴🟡  또 이전 시기처럼 바르고 가지런한 정물화가 아닙니다. 테이블은 기울어져있고, 테이블 위의 사물들은 곧 떨어질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뭔가 현실인 듯 현실적이지 않죠.🤷🏻‍♀️ 이렇듯 세잔은 관점과 평면을 분해하고 1차원의 시각에서 그리던 그림을 2차원의 시각으로 그려냅니다.

파블로 피카소 <Large Still Life with Pedestal Table> (1931, Musée Picasso, Paris, France)
세잔의 이러한 행보는 피카소 같은 20세기 입체파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피카소 또한 세잔에 영향을 받아 그만의 시각으로 정물화를 그렸어요. 기하학적인 모양을 바탕으로 기울어진 테이블과 사물들의 모습이 유쾌합니다.🤪  바로크 시대의 정물화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죠?

5. 요즘은 어떨까?

웨인 티보 <Salads, Sandwishes, and Desserts> (oil on canvas, 1962, Walker Art Center. Source: artsy.net)
현대 미술에서 정물화는 새로운 도전이자 실험이기도 합니다! 1920년생, 현재 100세의 나이로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미국의 인기 팝아티스트 웨인 티보. 그는 진열장 안의 케이크, 도넛, 사탕 등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디저트를 주제로 그립니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티보 회화는 부드러운 붓터치와 빈티지한 컬러 조합이 더해져 미술계의 미드 센추리 모던 스타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1960년대 그려진 작품)

🧓🏼
“나는 상점 쇼윈도, 디저트 가게 판매대, 슈퍼마켓 진열장을 대상으로 정물화를 그린다. 그림의 소재로 취급받지 못한 것들이다. 어떤 시대는 ‘그 시대만의 정물’을 만들어낸다. 나는 그에 대한 화가들의 지나친 의식이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실제보다 교양 있게 보이려 하는 행동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든다.”
- 웨인 티보

🙋‍♀️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국식 투박한 케이크를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여기며 오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웨인 티보가 한 이야기, 어떤가요? 지금(Now)을 살고 있는 예술가의 시대정신이 돋보이는 정물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죠?

예술가의 시선으로 일상을 포착하고, 주위에 자리 잡은 특별함을 놓쳤던 사물들에 대해 애정을 가져보세요.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생각 한 점 한 점이 세상을 빛나게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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